그림 읽는 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한복판에 우뚝 선 거대한 전자탑.
무수한 브라운관이 쌓여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 안에서는 빛과 소리, 시간과 기억이 요동친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의 〈다다익선〉
이 거대한 조형물 앞에 서면 나는 문득 한 시대를
통째로 마주한 듯한 전율에 사로잡힌다.
백남준의 대표적인 비디오아트 작품 가운데 하나.
CRT TV 1,003대를 가지고 제작한 높이 18.5 m의 비디오 타워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1988년 10월 3일 제작되었으며,
1,003대의 CRT는 10월 03일 개천절을 의미한다.
설계는 건축가 김원이 맡았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제목,
한자어의 고전적인 운율과 수백 대의 TV라는 전자 문명의 기묘한 결합은
곧 백남준이라는 예술가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혁신을 연결지어
‘전위(前衛)’를 예술로 바꾸어 놓은 마술사였다.
〈다다익선〉은 단순히 기술의 조형물이 아니다.
이 작품은 질문한다.
“이 무수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때로는 산수화가 흐르고,
때로는 색채의 파동이 춤을 춘다.
그 안에서 나는 텔레비전이라는 사물이 지닌 익숙함을 넘어,
그 너머의 메시지를 읽게 된다.
백남준은 시대를 관통한 예언자였다.
아직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그는 이미 ‘정보 사회’의 도래를 감지했고,
기계와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예술로 제시했다.
〈다다익선〉은 그런 예지의 결정체다.
아날로그 TV가 하나둘 사라져 가는 시대,
이 수백 개의 브라운관은 되려 묵직한 역사의 무게를 증언한다.
나는 이 작품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무한히 깜빡이는 화면,
끊임없이 교차되는 이미지들,
그 안에서 문득 나 자신을 본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화면을 넘기고,
수백 개의 정보와 감정의 파편을 쏟아내는 우리들.
〈다다익선〉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비추는 거울이다.
너무 많기에 잃어버리는 것,
그러나 많음 속에서도 끝내 찾아내야 하는 것.
백남준은 말했다.
“예술은 폭풍이 지나간 후의 무지개가 아니라,
폭풍 그 자체여야 한다.”
〈다다익선〉은 정적 속의 조형물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전류를 흘리고,
전율을 일으키며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탑이다.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많음이 예술이 되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백남준은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수백 개의 TV는,
마치 한 사람의 눈처럼 나를 응시한다.
너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다다익선〉은 오늘도 묻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앞에서 답을 찾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예술의 본질,
그 끝자락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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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CWrJMQbsGQ?si=kgnX-FL2fgCrXsw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