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1969년,
비행기 티켓 한 장이 평범한 여성의 손에 쥐어졌다.
당시 해외여행은 허가제였고,
여성의 혼자 여행은 사회적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지는 타히티의 바다,
이집트 사막 위로 쏟아지는 별빛,
아프리카 대지의 뜨거운 숨결-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경자(1924–2015),
이름처럼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고자 했던 화가는
붓 대신 가방을 들고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람, 그 숨결을 찾아
그녀의 캔버스는 풍경이 아닌 인간의 얼굴로 채워졌다.
인도 바라나시의 수행자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채 고요함을 머금었고,
스페인 그라나다의 두 자매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웃음 속에 삶의 단단함을 보여주었다.
이집트 와시스의 노인은 햇살에 그을린 주름살마다
시간의 흔적을 새겼고,
뉴욕의 춤추는 노이드는 도시의 고독을 몸짓으로 녹여냈다.
발리 섬의 무용수는 손끝에서 전통의 혼이 춤추듯 흘러나왔고,
태국의 전통 복장을 입은 여인은 비단 속에
감춰진 자부심을 눈빛으로 말했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이들이었지만,
그녀의 붓끝에서는 언제나 같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너는 누구인가?"
아프리카 마을에서 만난
한 여인의 깊은 눈동자를 그리던 그날,
천경자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다.
그 눈빛에서 자신의 어머니,
폐병으로 죽어간 여동생,
그리고 수십 년 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아버지와 맞선 소녀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림은 거울이다. 남을 그리다 보면 결국 내가 비친다"고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에 적었던 그 말처럼,
그녀의 여정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자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경계를 넘어선 자의 기록
1972년 베트남전 종군화가로 참전했을 때,
그녀는 전쟁의 참혹함보다 M-16 소총을
꽃나무 그늘에 기대어 놓은 병사의 모습을 그렸다.
"인간은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믿음이었을까.
이후 홍익대 교수직을 내던지고 12번에 걸친 세계 여행을 떠났을 때도
그녀는 조직과 안정을 버리는 대신 자유를 선택했다.
에티오피아의 황량한 대지에서 케냐의 활기찬 시장까지,
그녀는 '천경자풍'이라는 독창적인 화법으로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일본화의 섬세함과 서양화의 대담함을 융합한 채색은
마치 그녀의 인생처럼 갈등하지 않는 조화를 이뤘다.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세상이 등을 돌렸을 때도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며 선언했다.
"진짜 작품은 내 영혼에 있다."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투병하던 말년,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프리카 여인들의 초상을 다시 그렸다.
노년의 주름살마다 새겨진 인생의 흔적.
그것은 결국 자신의 초상이었다.
영혼의 꽃밭으로
2015년,
그녀의 유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 등장하는
뱀과 꽃의 여인은 여전히 관람객을 매혹한다.
누군가는 그 그림에서 한(恨)을 읽지만,
사실 그녀의 붓은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주술이었다.
"삶이 나를 울리면 나는 그림으로 웃는다"는 신조처럼,
그녀는 세상의 상처를 화려한 색채로 덮어내며
인공 낙원을 창조했다.
오늘날 그녀의 작품을 보는 이들은 단지 그림이 아닌,
한 여자가 시대의 편견을 뚫고 자아를 찾아간 용기의 기록을 마주한다.
지금도 어딘가를 향해 부는 바람에
그녀의 영혼이 실려 있을 것 같다.
경계 없는 여정을 꿈꾸던, 그 거침없는 바람의 화가.
Chopin: Nocturne Op. 9 No. 2 (Violin and Piano)
https://youtu.be/BCqfqTvitcg?si=2MIkA4ZTsZe_P9b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