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김향안은 경기 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시절,
오빠의 소개로 시인 이상을 만났다.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
시인 이상의 이 지극히 시인다운 고백으로 시작된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짧았다.
멀쩡한 여대생이 그 길로 짐을 싸들고 나와 1936년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이상은 홀로 도쿄로 떠났고,
그 이듬해 4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 김향안은 남편의 유골을 품고 돌아와야 했다.
멀쩡한 여대생이 시인의 사랑에 빠져 짐을 싸들고 나온 지
겨우 1년여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김향안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첫 번째 사랑이 너무 일찍 저물었다면,
두 번째 사랑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무명의 서양화가 김환기.
이미 이혼 경력에 딸 셋을 둔 남자였기에 그는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못하고 편지로만 마음을 전했다.
김향안의 부모는 당연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명확했다.
"사랑은 믿음이고,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면서 김향안은 본명 변동림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 개명했다.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과의 연을 스스로 끊는 결단이었다.
이때부터 김향안의 삶은 예술가의 아내이자 동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5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김향안은
파리 소르본느와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김환기도 이화여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아내를 따라 파리로 향했다.
1964년에는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했다.
서양 미술계를 직접 경험한 이 시간들은 김환기의 작품 세계가
국제적으로 확장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점화 시리즈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 뉴욕 시절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또다시 먼저 보내야 하는 순간이 왔다.
1974년 김환기의 죽음.
하지만 이번에는 김향안이 할 일이 분명했다.
남편의 예술을 세상에 알리고 보존하는 것.
그녀는 고인의 작품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모든 정열을 쏟았다.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1994년에는 국내 최초로 개인 사비로 환기미술관을 부암동에 열었다.
미술관 건립은 그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었다.
세계적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를 맡았고,
퐁피두 미술관 관장이었던 도미니크 보조도 참여했다.
작은 미술관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김환기라는 거장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는 한 여인의 치열한 의지였다.
김향안은 단순히 예술가의 아내로만 살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예술가였다.
『파리와 뉴욕에 살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등의 수필집을 발간했고,
개인전도 열었다.
두 천재 예술가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예술에 바친 삶을 글로 기록하고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2004년 2월 29일,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지 꼭 30년 만에 김향안도 뉴욕에서 영면했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웨스트체스터 공동묘지,
그토록 묻히고 싶어했던 남편의 묘지 바로 옆자리였다.
생전에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을 죽어서라도 함께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김향안의 인생을 돌아보면 '사랑은 가고 예술은 남다'는 말이 새삼 의미 깊게 다가온다.
이상과의 사랑은 1년여 만에 끝났지만,
그의 문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김환기와의 사랑도 30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유한했지만,
그의 점화들은 지금도 무한한 우주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술들을 지키고 보존한 김향안 자신의 헌신도
또 하나의 예술이 되어 우리 곁에 남아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나지만,
그들이 남긴 예술은 영원하다.
김향안은 그 진리를 몸소 보여준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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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3DE8HtQAN4?si=bwSlwqHa6pifB8-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