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박수근의 그림 앞에 서면 마음이 조용해진다.
거기엔 요란한 색채도, 극적인 구도도 없다.
그저, 너무도 익숙한 풍경.
돌담과 나무, 그리고 그 나무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
‘나무와 두 여인’은 한국의 골목, 삶의 여백, 어머니의 뒷모습 같은 정경이다.
그림은 작고 소박하지만, 그 안에는 한국인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거칠고 두꺼운 질감,
돌을 깎아낸 듯한 박수근 특유의 화풍은
시간을 견딘 삶의 주름 같다.
그가 표현한 여인들은 이름도, 사연도 없지만,
한 세기 동안 이 땅을 지켜온 어머니와 이웃들의 얼굴이다.
고단하지만 단단하고, 말없이 아름다운 존재들.
그림 속 두 여인은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쉰다.
아마도 장을 보고 돌아오며 잠시 멈추었을 것이다.
혹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지었을 수도 있다.
그 짧은 순간을 박수근은 영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화려하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내어주는 존재로 그림의 중심에 선다.
그 나무는 삶의 버팀목이자, 여인들의 작은 쉼터다.
박수근은 그 나무와 여인들을 통해
인간이 서로를 품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따스함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골목 어귀를 걸어가시던 모습.
늘 무언가를 이고, 묶고, 안고 계셨지만,
그 어깨는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그 고단한 어깨가 곧 이 땅을 지탱한 기둥이었다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박수근의 그림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듣는다.
엄마의 숨소리, 이웃의 안부, 오래된 나무가 흔드는 바람 소리.
그 모든 것이 캔버스 위에 새겨져 있다.
그는 한국인의 삶을 회화로 번역한 시인이다.
이 그림은 어쩌면 박수근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무처럼, 그는 시대의 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내린 채,
한국적인 것, 사람의 따스함, 고단한 삶의 품격을 그려냈다.
예술은 고귀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그는 삶을 화폭 위에 옮겨, 누구보다 진실한 화가로 남았다.
‘나무와 두 여인’을 보고 돌아서는 길,
나는 불현듯 그림 속 나무처럼 서 있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우리 곁의 소중한 사람들, 말없이 나를 지켜주던 이들.
박수근은 그들의 존재를 영원히 잊히지 않도록, 그림으로 새겨 놓았다.
그것이 바로 진짜 ‘국민화가’의 사랑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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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lcEurH9Cpg?si=2WUDuopoM4tj3g1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