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페미니스트, 나혜석
그녀는 조선의 땅에 서양화 물감이 스며들기 시작하던 해에 태어났다.
1896년 수원의 나부잣집, 호조참판의 손녀 나혜석.
아버지 나기정은 개명 관료로서 딸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일본 유학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진보성은 첩실에 어린 여자를 들이며
어머니 최시의를 평생 울리는 이중성과 공존했다.
서재에서 펼쳐진 세계지도와 안방에 스민 어머니의 눈물,
이 모순이 그녀 안에 "여자도 사람이외다"라는 선언의 씨앗이 되었다.
1920년 4월 10일,
경성의 신문들은 한 공개 청첩장으로 떠들썩했다.
변호사 김우영과 여성 화가 나혜석의 결혼 소식이었다.
파격은 의식의 장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의 딸과 동거하지 않을 것,
첫사랑 최승구 묘에 묘비를 세울 것".
백 년 전 조선에서 여성이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 것은 혁명이었다.
그 조건들은 가부장제의 철창에 흠집을 내는 붓질이었고,
그녀는 결혼 후에도 화실을 지켜냈다.
1921년 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그녀의 첫 개인전에는
이틀 만에 5천 명이 밀려들었다.
유화 70여 점 중 20점이 팔리는 대성공!
조선 여성 화가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27년,
외교관 남편과의 세계 일주는 그녀에게 창조와 파괴의 이중주를 안겼다.
파리에서 그녀는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의 거친 붓터치를 흡수하며
"무희"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빛나는 여정의 그림자에 천도교 지도자 최린이 서 있었다.
불륜으로 번진 만남은 1930년 이혼으로 이어졌다.
비극은 남편 김우영도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 상태였으나,
간통죄로 처벌받은 것은 그녀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혼 고백장을 발표한 그녀는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 선언하며
사회의 위선을 비판했다.
그러나 조선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 사회는 그녀를
'타락한 여인'으로 낙인찍었다.
이 작품은 나혜석의 첫 딸이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1933년 어느 날,
화실에서 번진 불길은 그녀의 작품 수백 점을 재로 만들었다.
남은 것은 소장가들 손에 흩어진 극소수 뿐 -
〈선죽교〉, 〈화령전 작약〉, 그리고 암청색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자화상은 우연이 겹쳐 아들 김건에게 전해졌다.
피난 중 한 남성이 다락방에서 찾아낸 그림을
"네가 가져야 할 것"이라 건네며 사라진 뒤였다.
그림 속 그녀는 어두운 배경 앞에 굳게 닫힌 입과 위를 향한 눈빛으로 응시한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무표정한 얼굴 -
이는 단순한 초상이 아닌,
여성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그녀는 화실을 잃고 수전증에
시달리며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1948년 겨울, 서울 자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홀로 눈을 감을 때,
그녀의 주머니에는 아이들이 그려진 초록 연필 스케치 한 장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 그녀의 작품은 박물관 유리 뒤에서 침묵한다.
〈자화상〉의 눈빛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남성 중심의 도덕이 그녀를 '스캔들 화가'로 만든 동안,
예술가 나혜석의 진가는 왜 감춰졌는가?
재판장에서 울려 퍼진 "여자도 사람이외다"의 외침은
여전히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그 목소리가 남긴 금은 깊어져 간다.
타버린 그림의 재 위에서,
나혜석은 여전히 조각난 유리창처럼 반짝인다-
깨어난 자의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비추는 거울로.
인형의 家 - 나혜석의 시 <노라>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유혹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퐁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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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가 / 김희진
https://youtu.be/zs19c3p9q9o?si=-WXxWNVfIWvZrtl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