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숨결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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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벽에 걸린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를 마주한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캔버스 위로 내리꽂힌 푸른 선들은 마치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고,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흐릿해지다 결국 백지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첫 붓질의 강렬함과 마지막 흔적의 여운 사이에서

나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목격하는 듯했다.



선(線)으로부터  1980.jpg 선(線)으로부터 1980



이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어떻게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걸까?

물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린 이 선들은 작가의

신체적 한계와의 투쟁이자 자연의 리듬에 대한 복종이었다.

붓에 묻은 안료가 중력에 순응하며 캔버스를 타고 흐르고,

마지막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끊임없이 선을 반복한다.



선으로부터  1979.jpg 선으로부터 1979



이 과정에서 선은 단순한 형태를 넘어 "시간의 육화(肉化)" 가 된다.

각 선은 동일한 행위의 결과물이지만,

물감의 양과 작가의 힘,

시간의 간격에 따라 전혀 다른 생명력을 띠었다.

마치 인간의 삶처럼.

시작은 명료하나 종말은 점차 희미해지고,

그 경계에서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



From Line  1978.jpg From Line 1978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은 선 그 자체보다 그 사이의 여백이었다.

동양화의 전통적 여백과 달리 이우환의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닌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이 부딪혀 일어나는 총체적 울림"이다.

선이 사라진 자리는 관객의 사유가 채워야 할 영역이었다.


나는 선의 시작점과 끝점을 오가며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마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이 "관계의 미학" 은 작품의 본질이 시각적 형태가 아닌 사물과 공간,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From Line.   80.5 x 100cm  1976.png From Line. 1976



"시작과 끝은 하나다. 끝이 없는 시작도 시작 없는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의 무한한 순환은 ‘영원’의 개념을 완성한다".


이 문장이 떠올랐다.

이우환은 선을 통해 우주의 순환적 시간관을 압축했다.

어린 시절 스승이 가르쳐준

"우주만물은 점에서 시작해 점에서 끝난다" 는 동양 사상이 점에서 선으로,

나아가 여백으로 확장된 깨달음의 과정.

그의 선은 수평으로 그려졌지만,

마치 우주의 나선 은하를 따라가는 듯한 종횡의 깊이를 지녔다.



20250622_065733.jpg From Line 1973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내내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죽음을 앞둔 그가 〈선으로부터〉 원화 아래서 영면했고,

이 작품은 그의 유작 앨범 표지가 되었다.


두 예술가는 서로 다른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예술적 상호작용이 있었다.

특히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우환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와의 협업을 통해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했다.

이들은 서로의 예술적 깊이를 존중하며,

현대 미술과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예술적 만남은 미술과 음악을 아우르는 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두 사람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류이치사카모트_12.png 류이치 사카모토 앨범 커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선들이 주는 고요함과 용기가 필요했을까?

예술이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영원의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결합이었다.

전시장을 떠나며 나는 선이 남긴 여백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우환은 말한다.


"내 작업은 다리다"


〈선으로부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존재와 부재, 생명과 죽음을 잇는 다리였다.

그 위를 건너는 순간,

나는 무한한 관계의 망속에서 한 점이 되어 흐르는 선에 녹아들었다.




붓끝에서 시작되어 백지로 사라지는 그 한 줄기의 여정—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가는 길임을
선은 고요히 증명하고 있었다.



20250622_071228.jpg From Line 1974




동풍.jpg 동풍



점으로부터.jpg 점으로부터



조응.jpg 조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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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사카모토의 레인

https://youtu.be/PY5LQQlvWLE?si=B4VSeWldM2Dg4g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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