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런던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려야 닿는 코벤트리.
이차대전의 폭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던 도시다.
그 잔해 속에서 옛 대성당의 골조만이 하늘을 향해 비통한 손가락처럼 서 있다.
사람들은 그 상처를 지우지 않고,
그 옆에 새 성당을 세웠다.
푸른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폐허의 성당.
밤이면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그 광장에서 미사를 드린다면,
과거와 현재, 상실과 희망이 교차하는 신성한 공간이 될 터였다.
그런데 그 새 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이 낯설다.
고개를 숙인 채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여인.
첫눈에 ‘애마 부인’이 스치며 어리둥절해진다.
영국 땅에 그런 동상이?
알고 보니 그녀는 11세기 코벤트리의 영주 부인, 고디바 부인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조상 어른을 공공장소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세워 놓은 것일까.
역사의 암흑기, 중세 코벤트리.
고디바 부인은 백성들이 짓눌린 세금에
신음하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마음 착한 그녀는 남편인 영주에게 세금을 대폭 감면해 달라 간곡히 청한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영주는 아내의 간청을 냉랭하게 거절했다.
고디바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했다.
지친 영주는 아내를 단념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라.
그럼 네 청을 들어주마.’
자신의 요구가 너무 황당해 부인이 물러날 것이라 확신하며,
그는 승리한 듯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디바 부인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백성들을 위한 사랑이 모욕보다 컸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시종들의 눈물 속에 고디바는 알몸으로 말에 올랐다.
존 콜리에의 그림 속 그녀는 부끄러움보다는 결연함으로 가득하다.
긴 머리카락이 살짝 가리는 몸보다,
오히려 그 얼굴에 흐르는 연민과 단호함이 더 눈에 띄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육체가 아니라,
백성을 향한 헌신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창문을 굳게 닫고 커튼을 치고,
일부러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자신들을 위해 목숨 같은 귀부인의 명예와 자존을 걸고 나선 고디바 부인을,
그 누구도 모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채 고통스러운 행진을 마친 고디바 부인은
영주와의 약속을 지키게 했고,
결국 백성들의 세금은 크게 줄었다.
그녀의 용기와 백성들의 응답은 역사 속 아름다운 전설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코벤트리는 이 전설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말 탄 여인의 형상은 도시의 로고가 되었고,
폐허 옆에 선 새 성당 광장에는 그 상징적인 동상이 세워졌다.
고디바 부인은 화가들의 영원한 뮤즈이기도 했다.
달리의 초현실적인 해석 속에서조차,
그녀는 관능의 대상이 아니라 신화적 용기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한다.
파괴된 옛 성당의 폐허와, 벌거벗은 채 말을 타고 있는 고디바 부인의 동상.
둘은 코벤트리라는 도시의 이면을 상징한다.
하나는 전쟁이 남긴 물리적 상처요,
다른 하나는 탐욕과 차가운 현실에 맞서 인류가 보여준 정신적 저항의 상징이다.
고디바 부인의 알몸은 취약함의 노출이 아니라,
오히려 탐욕과 부조리 앞에 가진 것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순수한 용기의 투사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시대는 어떤가.
고디바 부인 같은 용기를 발휘할 사람이 있을까?
여야를 막론하고 전 영부인들의 논란들 속에
그들은 이 이야기 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SNS에서는 수많은 ‘선한 행동’이 쏟아지지만,
진정한 희생을 감내할 용기는 점점 희귀해지는 것 같다.
명예와 안위, 편안함을 벗어 던지고
부당함 앞에 벌거벗은 마음으로 설 용기.
코벤트리 폐허 위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별빛은,
그런 용기가 여전히 세상을 밝힐 빛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고디바 부인의 동상은 결국,
상처 입은 도시가 자신의 가장 빛나는 정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다.
진정한 용기는 육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벌겋게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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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lcEurH9Cpg?si=GK1UolGPgCQBAq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