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과 평생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1.jpg



파리의 오후 햇살이 테라스 위에 녹아내렸다.

카페의 커피 향과 담배 연기,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거리.

한 여인이 유유히 거닐다 문득 카페 테라스에 앉아

스케치북을 열어놓은 화가를 발견했다.


연필 끝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마치 가벼운 발레 리듬 같았다.

선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솜씨에 여인은 매료되어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제 초상을 그려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당연히 하겠어요."



피카소가 1935년에 자신의 연인이 잠든 모습을 그린〈잠든 소녀〉



화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여인은 우아하게 앉아 포즈를 취했다.

화가는 연필을 휘휘 저었다.

눈이 스케치북과 모델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여인의 이목구비가 단숨에 종이 위에 떠올랐다.

생기가 번지는 얼굴, 반쯤 내려다보는 눈빛의 신비로움까지.

고작 삼 분 만에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든 여인은 감탄했다.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이 아름다운 그림 값이 얼마죠?"


"5,000프랑입니다."


여인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단 삼 분 작업에 5,000프랑이라고요?

이건 터무니없는 가격이에요!"





화가는 비로소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피로와 집중의 흔적이 서려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엔 확고한 무엇이 빛나고 있었다.


"마담, 이 그림은 삼 분이 아니라 내 평생의 결과물입니다.

지금 보시는 이 삼 분은 삼십 년의 눈물과 삼십 년의 배고픔,

삼십 년의 실패와 삼십 년의 집착이 응축된 시간이에요.

이 순간은 내가 수천 장의 종이를 갈아먹고,

수만 번의 지우개로 문질러 내 피를 토해낸 끝에 찾아온 거죠."


그가 내민 명함에는 ‘파블로 피카소’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여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유명한 거장이 테라스에서 무명 화가처럼 스케치를 하고 있을 줄이야.

그녀가 손에 쥔 스케치는 갑작스레 무게가 달라졌다.

단순한 연필 선이 아니라,

한 예술가가 인생 전체를 불살라 빚어낸 결정체처럼 느껴졌다.



Absinthe Drinker, 1901



길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스쳐 지나고,

카푸치노의 거품은 부드럽게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에게 그 공기는 달랐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결과’만을 쳐다본다.

무대 위의 빛나는 삼 분을 보지만,

그 뒤에 쌓인 어둠의 삼십 년은 외면한다.

요리사가 순식간에 완성한 접시 속에 녹아든 수많은 실패한 요리들,

작가가 쏟아낸 한 문장 뒤에 버려진 원고의 산,

발레리나의 완벽한 도약을 지탱한 무수히 부은 피와 땀.

세상은 보이는 시간만을 계산하지만,

진정한 가치는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의 두께에 깃든다.


피카소의 연필은 단지 선을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한 점 종이 위에 응축시켰다.

여인은 스케치를 꼭 끌어안았다.

5,000프랑이 아니라,

한 인간이 예술에 바친 생의 무게를 지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어떤 결과 앞에서도 묻곤 했다.

‘이 삼 분을 가능케 한 그대의 삼십 년은 무엇이었나?’ 하고.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빛나는 순간들 뒤엔,

보이지 않게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 있음을.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jpg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



Woman Dressed In Blue 1901.png Woman Dressed In Blue 1901



Woman Dressed In Blue 1901.png Woman Dressed In Blue 1901

------------------


https://youtu.be/TxlQMAtEDGA?si=JfxK5-Skz7NDLGYn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폐허 위에 선 벌거벗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