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스마트폰을 스치는 소리,
카드 단말기의 삑삑거림-
이제 현금을 만질 기회는 점점 희귀해져 간다.
중국을 여행하며 현금 지갑을 꺼낸 관광객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이미 유튜브의 흥밋거리가 되었다.
스테블코인과 CBDC가 화두가 되는 이 시대에,
종이 지폐의 운명은 점점 박물관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지폐 속 인물들의 논쟁만은 유독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은 물리적 지폐가 사라질수록,
그 위에 새겨진 역사적 평가의 무게가 오히려 선명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카드 결제가 일상이 되고,
암호화폐가 미래를 논하는 세상에서도,
지금은 사라진 오백원 지폐 속 이순신 장군의 초상은 묵직한 의문을 던진다.
임진왜란의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나라의 명운을 건진 그 영웅의 얼굴이,
비교적 낮은 액면가의 지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디지털 시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낯선 역설로 다가온다.
그의 피어린 실전의 공보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문적 깊이가 더 높은 액면가의 지폐를 차지하는 현실.
학문의 이론적 완결성이 피와 땀으로 쓴 구국의 현장성보다
더 ‘값나가는’ 가치로 평가받는 우리 사회의 무의식적 잣대는,
비단 종이 지폐의 시대만의 유물은 아닐지 모른다.
결국 우리가 화폐에 담긴 가치 척도에 던지는 의문은,
과연 무엇을 ‘높이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고민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더욱 날카로운 대비는 만 원과 오만 원 사이에 버티고 있다.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과 예술을 꽃피운 세종대왕,
그의 업적은 한 민족의 사고와 정체성의 지도를 새로 그린 문명사적 혁명이다.
그런데 그 거대한 창조의 얼굴은 만 원에 머물러 있다.
반면 오만 원의 자리는 신사임당에게 주어졌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모범적 모성과
뛰어난 예술적 재능은 존경받을 만하지만,
그녀의 역사적 파장과 국가적 차원의 기여가
세종대왕과 동등하거나 그를 능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어머니’라는 상징적 가치,
전통적 여성상의 구현이라는 또 다른 잣대가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창조적 혁신의 실질적 무게와 상징적 모성의 이미지,
우리는 무엇에 더 높은 ‘값’을 매기는가?
현금이 디지털 데이터로 대체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지폐 속에 갇힌 이 인물들의 역설은 더욱 선명한 유산이 되어간다.
그들은 결국 스스로를 그 작은 종이 위에 새기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선택한 가치의 프리즘을 통해 투영된 결과물이다.
이순신의 칼날보다 퇴계의 붓이,
세종의 창조적 폭발보다 신사임당의 조용한 모성적 완결성이
더 높은 숫자로 표기된 이 배치도는,
단순한 인물 선정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적나라하게 증언한다.
비록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는 지폐의 시대는 저물고 있지만,
그 위에 새겨졌던 인물들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메아리를 남긴다.
화폐라는 물리적 매체가 사라져도 남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그 안의 인물들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며 기억할 것인가? .
디지털 지갑 속의 추상적인 숫자들 너머로,
여전히 이순신 장군의 눈빛과 세종대왕의 혁신 정신은 묵묵히 되물으며,
우리가 진정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는지
끊임없이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이가 사라져도,
그 질문의 무게만은 계속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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