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원의 무게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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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에서 스치듯 나온 천 원권 지폐. 얇고 가벼운 종이지만,

그 위에 새겨진 이야기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1975년 처음 세상에 나온 이 지폐는 세 차례의 옷을 갈아입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다듬어 왔다.


2007년, 가장 최근의 변신. 앞면의 주인공,

퇴계 이황 선생의 엄숙한 초상은 변함없이 자리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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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유희(遊戯) 도구였던 투호(投壺)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명륜당’이라는 당당한 건물과 고고한 ‘매화’ 그림이 자리했다.

복잡한 관복의 흉배 무늬 대신 깔끔한 창호 무늬가 깔렸다.

뒷면에서는 오래도록 자리했던 도산서원 대신,

겸재 정선의 붓이 그려낸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라는

아름다운 산수화가 지폐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펼쳐졌다.

단순한 디자인 변경이 아닌, 뜻깊은 교체였다.


555.jpg 1975년에 처음 발행된 천원권은 1983년과 2007년에 도안이 바뀌었다


퇴계 이황. 조선 중기를 빛낸 성리학의 대가이자,

말년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스승이다.

새롭게 등장한 ‘명륜당’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던 성균관의 심장이었다.

생원, 진사로 선발된 우수한 유생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성스러운 공간이다.


퇴계 선생은 그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정3품)을

여러 차례 맡으며 이곳과 깊은 인연을 쌓았다.

지금도 보물로 지정된 명륜당은 그 위대한 교육 정신의 산 증인이다.


그리고 그 옆을 수놓은 매화나무. 선생이 생을 마감하던 날 아침까지도

나무에 물을 주라 신신당부했을 정도로 아꼈던 꽃나무다.

그 고고함과 절개는 선생의 인품 그 자체를 상징한다.

화폐에 새겨진 매화 한 가지에는 스승의 뜨거운 애정이 서려 있다.


계상정거도.jpg 정선의 계상정거도


뒷면을 압도하는 ‘계상정거도’는

겸재 정선이 71세의 노년에 완성한 역작이다.

퇴계 선생이 실제로 제자를 가르쳤던 서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산과 물을 담담하면서도 웅장하게 담아낸 풍경화다.


제목 그대로 ‘냇가에 조용히 머문다’는 뜻은 고요한 선비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시원하게 뻗은 산줄기와 잔잔한 강물,

소나무 숲에 안긴 소박한 집.

그리고 그 안에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은 평화로움의 극치다.

화려함보다는 담백함, 소란보다는 고요함이 지배하는

이 풍경은 퇴계 정신의 본질과 닮아 있다.


이 천원권은 단순한 교환의 도구가 아니다.

명륜당, 매화나무, 계상정거도.

이 세 요소는 각기 다른 모양이지만 하나의 정신으로 모인다.

그것은 평생을 후학 양성에 바친 한 성리학자의 공적이자,

학문과 인품으로 빛났던 고아한 삶의 정수다.


투호가 사라지고 교육의 공간과 절개의 상징이 자리 잡은 것은,

단순한 유희보다 지식과 인격의 함양을 중시했던

퇴계 정신의 승리를 의미하는 듯하다.


겸재의 그림 속 고요한 냇가와 책 읽는 이는,

스승 퇴계가 꿈꾸었던 학문과 수양의 이상향을 은유한다.


천 원의 액면가치는 미미할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정신적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손에 쥔 이 얇은 종이 한 장이,

한 선비의 평생을 바친 교육의 열정과,

고결한 인품을 담은 문화의 보물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겸재의 그림 속 평화로운 냇가처럼,

이 지폐 속에는 조용히 흐르는 우리 정신의 깊은 맥이 있다.


p.s 전면부 도안의 인물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퇴계 이황으로 현초 이유태 화백(1916~1999)이

그린 표준영정 도안을 적용했습니다. 다음 편인 이유태 화백에 대해 기대바랍니다.



초록의 여름과 어울리는 힐링 클래식

https://youtu.be/nHD79c5JKRo?si=fPW_mg5i0xt362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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