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의 초상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11.jpg 이유태 <퇴계 이황 선생 영정, 비단에 채색, 120×84cm, 1974, 한국은행 소장


주머니에서 스치듯 나온 천 원권.

전면을 가득 채운 퇴계 이황의 엄숙한 초상은 단순한 인물화가 아니다.

1975년 첫 발행 당시부터 지폐를 지켜온 이 초상은

화가 이유태(1916~1999)의 붓끝에서 탄생한 표준영정이다.


겹겹이 펼쳐진 산수,

그 끝없는 여정을 담은 ‘강산무진’의 한 폭이 눈앞에 스민다.

여덟 폭의 병풍이 이어져 한 폭이 되고,

네 벽의 그림이 모여 무한한 강산을 이루는 풍경.

그 거대한 숨결 속에 이태화 화백의 붓놀림이 스며들어 있다.

종이 위에 깃든 한국 산천의 혼이었다.


전시장 전경(강산무진도)


그의 예술 인생은 섬세함과 웅장함 사이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이었다.

1935년,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채색화의 정교한 기법을 배운 것이 첫걸음이었다.

전통의 핏줄을 이어받은 씨앗이 일본 제국미술학교의 토양을

거치며 더욱 다채롭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1937년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거리의 지게꾼’으로 첫 입선한

젊은 화가는 곧 주목받기 시작했다.

초기 그의 화폭을 장식한 것은 우아한 여인상들이었다.

「여인-지·감·정」 삼부작(1943)과 「인물일대-탐구·화운」(1944) 같은

특선작들은 날렵한 선묘와 사실적이면서도 신선한 채색,

세심한 구도로 빚어낸 걸작들이었다.



3-horz.jpg 여인삼부작 - 지.감.정



서른 살 무렵까지, 그의 붓끝은 인간 내면의 우아함과

복잡미묘한 정서를 포착하는 데 천착했다.

마치 봄날 한창 무르익은 꽃송이처럼 화려하고 정밀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그의 예술에 새로운 봄을 불러왔다.

단구미술원 동인으로 참여하며 민족 전통회화의 창조적 계승을 모색했던 시기,

그의 화풍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전환하기 시작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부임한 것은

안정된 창작의 터전을 마련해주었고,

교단에서 30년을 보내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로서의 길도 열렸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캔버스 위에서 일어났다.

1955년 국전 추천작가로 출품한

「가야심추(伽倻深秋)」는 그 전환의 신호탄이었다.



설악심추



고요하고 깊은 가을의 가야산을 담은 이 작품은 사실적 묘사 너머,

산수에 깃든 정신적 깊이(심의적 표현)를 탐구하는 그의 새로운 예술적 지향을 선언했다.


그리고 1965년, 신문회관화랑 개인전.

그곳에서 세상을 압도한 것은 「강산무진」의 4부작이었다.

각각 8폭의 대형 병풍으로 이루어진 총 32폭의 장대한 연작.

끝없이 이어지는 강산의 기운을 웅대한 구성과 수려한 필치로

압축해낸 역작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한국 산천이 지닌 영원한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찬송이었다.

이후 그의 화폭은 설악산의 사계절을 집중적으로 담아냈다.

설악의 웅장한 기백과 섬세한 정취를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승화시켜,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속리설효



봄의 여인상을 그리던 그 붓이,

이제는 한국 산수의 영혼을 호흡하며 또 다른 봄을 창조하고 있었다.

백양회 창립회원,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그의 명성은 쌓여갔지만, 화실의 이유태는 변함없이 붓을 들었다.


전통의 정수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고된 작업,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으리라.

여인상의 정밀한 아름다움과 강산무진의 웅혼한 기상.

그의 예술 세계는 마치 대비되는 두 개의 봄과 같다.



추경산수



하나는 인간 내면의 정원에 피어난 섬세한 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산천에 깃들어 영원히 이어질 생명의 숲이었다.

그의 붓은 두 개의 봄을 모두 정성껏 가꾸어,

한국 근대 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초록의 흔적을 남겼다.

화폭 속 무진한 강산은 지금도

그의 예술 정신이 끝없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싹이 트고 있음을.


하산



https://youtu.be/vxvvtFx4amY?si=P3SNFDJZU8BW5R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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