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주머니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나온 오천 원 지폐.
그 초록빛 종이 위에는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선,
찰나의 만남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무게가 깃들어 있다.
이 지폐는 1972년 첫 선을 보인 후 23년의 침묵을 깨고
1983년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조선의 큰 스승,
율곡 이이(1536~1584)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지폐 앞면을 채운 강릉 오죽헌(烏竹軒)은 율곡이 태어나 자란 공간이자,
이름처럼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烏竹)’가 우거진 곳이다.
가늘고 검푸른 대숲은 선비의 강직함과 절개의 상징이었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이 한옥은 단순한 고택이 아니라,
조선 주거 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서다.
검은 대나무 그림자 아래서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의 가르침을 받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키웠을 터.
지폐 한켠에 스민 오죽의 그림자는 그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낳은 빛나는 결실을 은유한다.
뒷면을 장식한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조각들은 더욱 찬란하다.
여덟 폭 병풍 중 세 폭의 정수를 가려 뽑아 재탄생시킨
이 그림들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다.
수박은 씨앗이 풍성하게 박혀 다산과 풍요를,
맨드라미 꽃은 닭 볏을 닮아 벼슬과 출세를 기원하는 상징이다.
여치와 달개비풀, 그리고 살랑이는 나비까지,
각 생명체와 식물은 조선 여성의 예리한 관찰력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고스란히 전한다.
이 초충도는 신사임당이라는 한 여성이 예술로 승화시킨 우주적 생명력의 찬가다.
어머니의 붓끝에서 피어난 풀벌레들의 생동감은
아들 율곡의 학문적 탐구 정신과 다르지 않다.
오천 원권은 율곡과 사임당,
어머니와 아들의 정신적 유전자를 종이 위에 압축해 놓은 듯하다.
오죽헌의 검은 대나무가 상징하는 지조와 초충도의 생명력이
만나는 교차점에 이 지폐의 영혼이 있다.
손때 묻은 지폐 한 장이 5000원의 가치를 넘어,
조선 최고의 지성과 예술가의 혼을 전하는 매개체가 되는 순간이다.
흥미롭게도 1977년 발행된 미사용 구권은 온라인에서 76,500원에 거래된다고 한다.
시간은 돈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법이다.
오늘도 수많은 손을 거쳐 흐르는 이 초록빛 종이는 단순한 구매력 이상으로,
우리가 지나쳐버리기 쉬운 역사의 숨결을 부드럽게 건네준다.
지폐를 펼칠 때마다 오죽헌의 대나무 소리가,
초충도의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오는 듯하다.
그것이 오천 원이 주는 가장 값진 ‘잔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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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VjfeR5uFko?si=2B1mOlqQb33Zsx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