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주머니 속 오천 원과 오만 원 지폐를 꺼낼 때마다,
우리는 알지 못한 채 한 화가의 인생을 스치고 있다.
이종상(李鍾祥)—호는 일랑(一浪).
한학자 월당 홍진표가 지어준 이 아호는
‘첫 번째 파도’이자 ‘높고 큰 물결’을 상징한다.
그의 예술 인생은 이름처럼 도전과 창조의 연속이었다.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미대 재학 중
24세의 나이로 국전 사상 최연소 추천작가에 올랐다.
아버지의 크로키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움직이는
생명체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감각을 길렀고,
이 능력은 후일 초상화의 정신을 사로잡는 ‘접신(接神)’의 기초가 되었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 선봉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으며
체험한 민주의 열기는 작품 〈장비〉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혁명의 불꽃을 그림으로 지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군사정권이 주관하는 국전에 은유 가득한 노동자 형상을 담아 3년 연속 특선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화폐와의 인연이다.
1977년 서른일곱의 나이로 오천 원권 율곡 이이 초상을 완성하며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당시 영국인 디자이너가 만든 ‘서양인 같은 율곡’ 도안이 논란을 일으키자,
이당 김은호의 추천으로 긴급히 투입된 그는 병상의 스승을 찾아가며
조선 선비의 기상을 종이 위에 되살렸다.
31년 후인 2009년, 오만 원권 신사임당 초상화를 그리며
모자(母子)가 한 나라의 지폐를 장식하는 세계 유일의 화가가 되었다.
신사임당의 얼굴은 고증학자와 협업해 출토복식과 골상을 분석했으며,
이당의 원화에서 “국가의 부를 상징하도록 턱선을 풍요롭게” 다듬었다.
그의 붓끝은 단순한 초상을 넘어 한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했다.
1960년대 ‘문화영토론’을 주창하며 고구려 벽화 연구에 매진했고,
중국의 동북공정 시기에는 북한의 요청으로 고분 벽화 보존을 지원했다.
“벽화의 색채가 천 년을 버틴 비결은 석회암 수막 코팅 기술”이라며,
선조들의 과학적 지혜에 주목했던 그는 광개토대왕 영정에서 철갑을 입은 장수 모습을 구현해
기존의 왕권 상징을 뒤집었다.
1977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그는 세계 최초로 독도에 발을 디딘 화가가 되었다.
치안본부의 제한을 뚫고 들어가 그린 〈독도진경전〉은 울릉도 박물관에 영구 전시되며
“예술로 영토를 지킨다”는 신념의 증표가 되었다.
2008년 도쿄 전시회에 독도 작품 출품을 시도했으나
일본 측의 저지로 좌절한 일화에서는, 그의 예술이 가진 정치적 저력을 엿볼 수 있다.
영정 작업에서 그는 ‘영(影)’과 ‘정(幀)’의 철학을 실천했다.
“초상화는 형체만, 영정은 혼을 담는 것”이라며
고산 윤선도 영정을 위해 4년간 후손의 골상을 분석하고
사상연구에 매달려 체중 30kg이 줄어들기도 했다. 원효대사 영정을 그리기 위해
동국대에서 《기신론》을 공부한 끝에 화가 최초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일화는,
그의 열정을 증명한다.
“돈을 그린 화가는 돈을 돌 보듯 하라.”
-스승 이당 김은호의 가르침
오늘도 수많은 손을 거치는 지폐 속 초상은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한 예술가가 민족의 얼굴을 새기며 남긴 혼의 편린(片鱗)이다.
이종상의 붓끝에서 피어난 파도는 종이 위 역사가 되고, 우리 손금에 스민다.
https://youtu.be/6f8IPyg7AxA?si=3XlkZrD5ok1mme8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