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모처럼 아내가 여유로운 시간이 생겨서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사극 중에 역대 시청률을 기록한 5개 작품으로 압축 시켰다.
사극이 실제 역사를 드라마로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해주며,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각 드라마는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의 성장,
갈등을 통해 사극만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1위. 태조 왕건 (최고시청률 60.2%) - 후삼국 시대 왕건의 고려 건국 과정을 그린 200부작 대작
2위. 대장금 (최고시청률 57.8%) - 조선 중종 시대 장금이 궁중 최고의 의녀가 되는 여성 성장 서사
3위. 해신 (최고시청률 33.1%) - 신라 말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이야기
4위. 이산 (최고시청률 35.5%) - 정조의 어린 시절부터 개혁 과정을 그린 작품
5위. 동이 (최고시청률 33.6%) - 천민 출신 동이가 숙빈이 되기까지의 신분 상승 스토리
물론 예전에 다 본 드라마이지만,
동이를 보면서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사실에
우리 부부는 치매를 의심하며 재미있게 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궁중 의상과 갈등이 치열한 정치적 암투.
30%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동이>는 단순한 왕실 로맨스가 아니다.
천민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 동이가 숙종의 후궁이 되고,
나아가 영조라는 위대한 군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역사가 허구보다 더 극적인 순간을 그린 서사시다.
그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의 뒤에 조용히 걸린 그림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 시대가 갈구했던 소망의 상징이자 등장인물 운명의 암시자로 다가온다.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단연 연화도(蓮花圖)다.
진흙탕에서 피어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
《본초강목》이 ‘강하고 굳세어 영구히 살며,
씨앗은 생의(生意)를 간직하고 있다’고 묘사한 그 꽃은,
고대 인도부터 여성의 생식력과 다산, 생명 창조의 상징이었다.
조선 왕실에서 후궁들의 방에 연화도를 걸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蓮)’이 ‘연(連)’과 음이 같아 ‘연이어 계속된다’는 의미로,
특히 연밥을 쪼는 새와 결합하면 ‘연생귀자(連生貴子)’,
즉 귀한 아들을 끊임없이 낳는다는 강렬한 기원이 된다.
물고기 또한 수많은 알을 낳는 다산의 상징으로 그림 속에 함께 그려지곤 했다.
동이, 그녀의 존재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연화도가 아니었을까?
천민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
왕실이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숙종의 사랑을 받고,
영조라는 ‘귀자(貴子)’를 잉태한다.
그녀의 일생은 연화가 상징하는 생명력과 끈질김,
그리고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왕실에 가장 소중한 ‘다산(多産)’
그 자체를 실현해내는 과정이었다.
반면, 희빈 장씨의 방 뒤에도 어김없이 걸려 있었을 연화도는
냉혹한 아이러니를 품는다.
야사에 전해지는 그녀의 최후는 끔찍하다.
자신이 낳은 아들의 생식 능력까지 훼손하며
숙종의 혈맥을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는,
연화도가 상징하는 생명 창조의 기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극한의 질투와 절망을 보여준다.
연화도가 꿈꾸는 생명의 연속성 앞에,
그녀는 스스로를 파괴의 상징으로 남겼다. 그
래서인지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것이다.
숙종의 뒤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은 매화도(梅花圖)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뚫고 은은한 향기를 품으며 피어나는 매화.
유교적 관념에서 군자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다.
임금 곁에 매화도를 거는 것은 신하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추위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는
그 강인함은 통치자에게 바치는 무언의 서약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동이의 운명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림은
아마도 화조도(花鳥圖)와 그 안의 목단화(牧丹花), 즉 모란일 것이다.
화조도는 꽃과 새, 돌을 주로 그려 자연의 조화와
생명의 화려함, 장수를 염원하는 그림이다.
그 안에서 모란은 단연 돋보인다.
‘화왕(花王)’이라 불리며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모란은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부귀(富貴)’의 상징이었다.
그 단독 그림은 ‘부귀도(富貴圖)’, 크게 그리면 ‘대부귀도(大富貴圖)’가 된다.
바위(장수)와 함께하면 ‘부귀장수(富貴長壽)’,
장닭(공명)과 함께하면 ‘부귀공명도(富貴功名圖)’,
항아리(평안)와 함께하면 ‘부귀평안(富貴平安)’을 의미한다.
특히 백발의 새 두 마리(백두조)와 함께 그려진
‘부귀백두도(富貴白頭圖)’는
부부가 백년해로하며 부귀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동이가 숙빈 최씨로, 나아가 영조의 어머니로 우뚝 섰을 때,
그녀의 뒤에 걸렸을 그림은 바로 이 부귀와 번영의 상징,
모란이 아니었을까?
천민의 신분으로 시작해 왕실의 가장 높은 자리 중 하나에 오르고,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끌 군주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의 인생 궤적은 ‘부귀’라는 말이 결코 허황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부귀는 단순한 사치나 권력을 넘어선다.
그녀가 낳은 아들, 영조라는 ‘귀자(貴子)’를 통해
조선 왕실의 혈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부귀는 연화도가 갈구했던 다산과 생명의 연속성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모란의 화려함은 연꽃의 생명력이 결실을 맺은 모습이기도 했다.
<동이>라는 드라마는 동이의 개인적인 성공 이야기를 넘어,
조선 시대 사람들이 그림 속에 투영한 가장 보편적이고도
강렬한 소망들의 리얼하게 보여준다.
진흙 속에서도 청정하게 피어나 다산을 약속하던 연꽃의 꿈.
추위를 이기고 고고함을 지키는 매화의 절개.
마침내 화려하게 피어나 부와 영광을 상징하는 모란의 꽃망울.
동이의 삶은 이 모든 상징들이 교차하고 응축된 공간이었다.
그림 속 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한 여인의 일생을 관통하며 시대의 염원이 깃든 무언의 서사시였다.
화면 속 화려한 의상과 갈등 뒤로,
조용하지만 위압적으로 자리한 그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왕실의 영광도, 한 여인의 치열한 생애도,
결국 인간이 그리는 가장 원초적인 꿈 –
생명의 이어짐과 번영,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개인의 영광 –
위에 피어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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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GosKeUl0cY?si=pRY-OTD1FD2wygG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