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한국 회화사의 진정한 시작을 한 삼국 시대 중엽,
4세기경.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세 왕국이
중국 대륙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피어난 미술의 꽃이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한반도의 지리적 정서와 각국의 독자적 기질이 빚어낸 고유한 예술적 성취였다.
지형이 빚은, 세 가지 빛깔의 혼
삼국 미술의 차이는 땅의 기운에서 비롯되었다.
북방의 거친 바람과 넓은 평야를 품은 고구려의 회화는 웅혼(雄渾)하고 동적이었다.
압록강 연안의 고분 벽화,
특히 안악 3호분(행렬도)의 주인공 초상이나
무용총의 수렵도에서는 힘찬 필치와 생동감 넘치는 구도,
과장된 인체 비례를 통해 고구려인들의 활달하고 씩씩한 기상을 생생히 전한다.
후기로 갈수록 우주관을 상징화한 사신도(四神圖 -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가 유행하며,
통구의 사신총 벽화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로 신비로운 공간을 연출했다.
이는 북방 초원의 기상과 불교적 세계관이 결합한 고구려 예술의 정수다.
반면, 서남해안의 부드러운 기후와 중국 남조(南朝) 문화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자란 백제의 미술은 우아하고
내추럴한 미감을 지녔다.
공주 송산리 6호분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고구려의 격동보다는 안정된 균형감과 유연한 선을 보인다.
특히 백제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은 부여 규암리 출토 산수문전(山水文塼)이다.
이 벽돌에 부조된 산수도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근경의 수면,
중경의 삼산(三山) 형상과 소나무,
원경의 봉우리와 구름,
산중턱의 누각과 승려까지 포괄하는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산세와 정교한 세부 묘사는 은제탁잔 뚜껑의 산악문과 함께
백제인이 추구한 세련되고 온화한 자연관을 반영한다.
아좌태자가 일본에서 그린 '아좌태자의 쇼토쿠태자상'은
비록 직접 전하지 않지만,
백제 인물화의 높은 수준을 암시하는 귀중한 기록이다.
동해안에 자리 잡고 늦게까지 왕권을 강화한 신라의 미술은
삼국 중 가장 자료가 희귀하나,
장엄하고 조화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는
신라 회화를 대표하는 현존 최고의 걸작이다.
날개 없는 백마가 구름 위를 힘차게 달리는 모습은 신라 귀족의 권위와 내세관,
당시 회화의 세련된 선과 채색 기법을 엿보게 한다.
황남대총 출토 칠기편의 우마도(牛馬圖) 또한 생동감 있는 동물 묘사를 통해
신라 화가들의 관찰력과 표현력을 짐작케 한다. 영주 어숙묘의 희미한 벽화 잔 편은 고구려의 영향 아래 신라만의 엄숙한 정제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불교, 삼국 미술의 심장을 뛰게 하다
삼국 미술의 가장 강력한 동력은 불교의 전래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순도의 불상 전래를 시작으로,
백제와 신라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건축, 조각과 더불어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분 벽화의 연화문, 사찰 장엄을 위한 불교 회화,
내세관을 반영한 사신도와 극락정토 장면 등은 모두 불교 사상이 미술에 스며든 증거다.
삼국 미술을 거의 불교 예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삼국 시대 회화의 위대한 유산은 일본 미술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이다.
6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 안사라아(安未多),
고구려의 담징(曇徵), 가서일(加西溢) 등의 화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다.
이들은 호류사 금당 벽화를 비롯한 아스카 시대 미술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일본 최초의 전문 화가 집단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 왕족 후손인 하성(百濟河成, 782~853)이
헤이안 시대에 '일본 제일화가'로 칭송받은 사실은
삼국 회화의 맥이 일본에서도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아쉽게도 삼국 시대의 회화는 고분 벽화와 공예품 장식,
문헌 기록 등 그림자의 형태로만 전해진다.
목판화나 비단 그림 등 대부분의 작품은 시간의 풍상에 사라졌다.
그러나 안악 3호분의 위엄, 무용총의 박력, 산수문전의 정취, 천마도의 신비로움 속에는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미적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그림자들은 비록 온전하지 않으나,
삼국의 뜨거운 예술혼이 불교의 빛을 받아 어떻게 피어났는지,
그리고 그 빛이 어떻게 동해바다를 건너 이웃을 비추었는지를 생생히 증언한다.
그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2000년 전 화가들의 붓끝에서 막 피어나려 했던 한국 회화의 첫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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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5mJbcDGJq8?si=XLaBixaZ7HKzJh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