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 세계는 여인 없이 완성될 수 없었다.
그의 창조적 여정은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감정의 풍경 위에 세워졌다.
각 연인은 새로운 예술적 시기를 열었고,
그들의 육체와 영혼은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형태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예술의 이면에는 깊은 상처와 비극이 서려 있었다.
피카소는 화풍이 변할 때마다 새로운 여인이 나타난다.
9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80년 가까이 여섯 명의 애인과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
1904년, 몽마르트르의 낡은 아틀리에에서 피카소는
붉은 머리의 페르낭드를 만났다.
그녀의 쾌활한 성격은 그의 청색 시대의 우울함을 녹여내었고,
캔버스는 갈대숲 속 목가적 풍경과 서커스 배우들의 따뜻한 색채로 채워졌다.
〈물랑 드 라 갈레트〉(1900)에서 그녀의 관능적 곡선은 분홍과
오렌지의 생동감으로 피카소의 내면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9년의 동거 끝에 피카소는 그녀를 떠나 병약한 에바 구엘의 품으로 갔고,
페르낭드는 가난과 망각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소유욕이 강해졌고,
결국 유부녀였던 그녀는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낭드와 동거할 때 피카소는 그의 대표작인〈아비뇽의 처녀들, 1907〉을 그렸다.
그의 두 번째 뮤즈는 페르낭드의 친구 중 한 명인 에바 구엘(Eva Gouel)이었다.
에바 구엘과 피카소는 연인으로 3년 동안 함께 지냈다.
안타깝게도 에바는 1915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 마졸리 Ma Jolie〉 (1912) 를 비롯한 피카소의 여러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1917년, 러시아 발레단의 별이었던 올가는
로마에서 피카소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흥미롭게도 올가는 피카소의 입체파 화풍을
싫어해서 피카소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
이는 피카소로 하여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전환하게 했다.
〈올가의 초상〉(1918)에서 그녀는 잉그레스 풍의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위엄 있게 앉아 있다.
그러나 결혼 후 피카소의 변심이 드러나자 올가의 초상은 점차 왜곡되기 시작했다.
〈큰 나체의 적색 안락의자〉(1929)에서는 날카로운 이빨과 괴물 같은
형상으로 변해 버렸다.
이혼 후 올가는 정신착란에 빠져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피카소의 방탕한(?) 바람둥이 성격으로 1927년 이 부부는 갈라서게 된다.
피카소는 사랑의 미련이 아닌 양육비와 재산 분할을 피하기 위해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1927년, 파리 백화점에서 17세의 금발 소녀 마리 테레즈를 본 피카소는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함께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녀의 관능적 몸매는 피카소에게 조각과 같은 형태로 재해석되었다.
〈꿈〉(1932)에서 그녀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관능적으로 몸을 틀고 있으며, 얼굴은 두 조각으로 나뉘어
사랑과 욕망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마리 테레즈는 "그와의 삶은 평화로웠다"고 말했지만,
피카소가 떠난 후 1977년 그녀는 차고에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짧은 신고전주의 시대를 끝내고
초현실주의풍의 독특한 작품을 그리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야라는 딸이 있었지만
피카소의 불성실한 생활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고
마리 테라즈 발터는 우울증에 걸린다.
1936년, 카페에서 칼로 손가락을 찌르며 퍼포먼스를
하던 지적인 예술가 도라는 피카소를 매료시켰다.
그녀는 〈게르니카〉(1937) 창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동시에 〈울고 있는 여인〉 연작의 모델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의 얼굴은 파란색과 보라색의 조각으로 분해되며
고통에 찢긴 내면을 드러낸다.
피카소는 "여자는 고통받는 기계"라고 냉소했고,
도라는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 중 피카소를 찾아간 21세의 여류화가 프랑스와즈는 예술적 동반자로서 특별했다.
〈꽃을 든 여인〉(1946)에서 그녀는 태양 같은 얼굴과
푸른 드레스로 생명력을 발산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모델로
〈클로드와 팔로마〉(1951) 같은 따뜻한 가족 초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의 여인 중 유일하게 스스로 관계를 끊고 화가로 독립했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아이들과의 교류를 영원히 끊었다.
그녀 또한 피카소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 열정조차도 피카소의 이상한 행동을 견뎌낼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카소의 학대와 바람기를 참지 못하고 1953년에 그를 떠났다.
이후 그녀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폭로한 책
《피카소와 함께한 삶》을 출간해서
피카소에게 모욕감과 패배감을 주었다.
72세의 피카소가 만난 자클린은 그의 말년을 지켰다.
그녀는 피카소의 작품에 400회 이상 등장하며 단순화된 선과 강렬한 색채로 표현되었다.
〈앉아있는 여인〉(1962)에서 그녀의 검은 눈과 긴 목은 추상적 형태로 재구성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다"는 그녀의 말처럼,
피카소가 죽은 지 13년 후 그녀도 권총으로 자살하며 충절을 증명했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예술사에 영원히 새겨진 아이콘이 되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그의 손녀 마리나는 "그는 그림에 서명할 때마다 우리 가족의 피가 필요했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여인들은 그의 캔버스 위에서 신화적 존재로 승화되었으나,
현실에서는 정신적 붕괴와 자살이라는 어둠에 삼켜졌다.
이 모순적 진실은 예술 창조의 숨겨진 대가를 묵묵히 증언한다.
피카소의 붓끝에서 피어난 여인들의 초상은 천재의 예술적 열정이 남긴 영광과 상흔의 이중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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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EvETKqePBc?si=KS3qKAJP_Aan5uD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