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1915년 파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는
조각가의 손길로 화폭을 다루었다.
그의 초상화는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린 인물,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으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을 이끌었다.
〈앨리스〉 역시 그러한 조형적 실험의 정수였다.
눈썹, 코, 입술, 머리카락까지 검은 윤곽선으로 경계를 긋고,
"이상할 정도로 큰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이 초상은
모딜리아니 특유의 기법이 집약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림의 대상이었다.
당시 22세의 앨리스는 16세 천재 소설가 레몽 라디게의 연인이자,
훗날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모태가 되는 여성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앨리스를 그린 지 3년 뒤,
라디게는 《육체의 악마》(1923)를 발표한다.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인의 아내 마르트와
고등학생 프랑수아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다.
전쟁이 끝나고 마르트는 아이를 낳다 죽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며,
"프랑스 심리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여기서 마르트는 바로 앨리스의 문학적 변주였다.
라디게는 실제 열 살 연상의 연인을 소설 속 열아홉 살 여성으로 투영했고,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그 연결고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 삼중주는 영화 〈육체의 악마〉(1947)에서 다시 부활했다.
화가의 캔버스, 작가의 글, 영화의 프레임—
세 예술 장르가 한 여인의 이미지를 통해 교차한 순간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를 "조각처럼 표현해 낼 기회"로 여겼다.
〈앨리스〉에서 두드러지는 검은 윤곽선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입체감을 압축한 조형 언어였다.
르네상스의 우아함(계란형 얼굴)과 아프리카 미술의 원시성(각진 형상)을
화해시킨 그의 스타일은,
목의 원통형 처리와 드레스의 청색 대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특히 정면을 응시하는 앨리스의 눈빛은 모딜리아니 작품 중 희귀한 구도로,
관객과의 대화를 요청하는 듯하다. 이는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인물을 조각처럼 빚어내려는" 그의 집요한 실험이었다.
"붓끝이 아닌 조각칼로 그린 그림"
검은 선은 육체의 경계이자 영혼의 경계였다.
앨리스의 눈동자에 갇힌 시간은 전쟁의 상흔과 사랑의 열망을 동시에 비추었다.
모딜리아니가 앨리스를 그리던 1915년 파리는 전쟁의 그림자에 짓눌려 있었다.
《육체의 악마》의 배경이 된 이 시대는
"전쟁의 화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공간이었다.
앨리스의 푸른 드레스는 청년 라디게의 불안한 청춘을 상징했고,
새까만 눈동자는 전장으로 떠난 군인의 빈 자리를 응시하는 듯했다.
모딜리아니는 이런 시대적 트라우마를 초월해 영원의 미를 추구했다.
그의 윤곽선은 일시적인 전쟁의 상처를 영원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도구였다.
〈앨리스〉는 덴마크 국립미술관에 걸린 후
"덜 추상적"이라 평가받았으나,
이는 오히려 인간 내면의 깊이를 포착한 모딜리아니의 역량을 증명했다.
이 작품은 라디게의 소설, 전후 영화를 거치며 문화적 상징으로 재탄생했다.
앨리스의 얼굴은 세 가지 예술 장르를 관통하며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해체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스물두 살의 여성은 소설 속 열아홉 살 마르트가 되고,
다시 영화 속 트라지컬 히로인이 되었다.
이중적 정체성—현실의 연인이자 문학의 뮤즈—이 캔버스 위에 영원히 봉인된 것이다.
〈앨리스〉는 모딜리아니의 유일무이한 정면 초상이다.
그의 다른 모델들이 우아한 측면을 보인 반면,
앨리스는 관객을 똑바로 마주보며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은 나를 보는가, 아니면 나를 투영한 남자들의 환상을 보는가?"
검은 윤곽선은 그녀를 현실에 묶으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아이콘으로 승격시켰다.
오늘날 이 초상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1915년 파리의 예술적 열정,
전쟁의 아픔,
금지된 사랑의 비극을 동시에 마주한다.
모딜리아니의 붓은 한 여인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조각해낸 것이다.
화가 모딜리아니의 불꽃같은 사랑과 굴곡진 삶,
예술 세계를 담은 영화 '모딜리아니'는 "강렬한 그림만큼이나
로맨틱하고 잊을 수 없는 에너지가 있는 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연기 장인 앤디 가르시아가 모딜리아니의 역을 맡았다.
오롯이 그림에 집중한 모습과 함께 그의 영원한 뮤즈이자 열렬하게
사랑에 빠졌던 '잔'이 화폭 속 주인공처럼 앉아있어 눈길을 끈다.
여기에 "당신의 영혼까지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릴게요"라는
'모딜리아니'의 대사는 감각 너머의 세계를 신비롭게 그려냈던
그의 작품 세계를 담는 동시에 두 사람의 정열적이면서 비극적이었던
사랑을 그렸다.
모딜리아니(Modigliani, 2004)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