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아무래도 그를 사면해줘야 할 것 같아.”
“그자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른 전과도 셀 수 없이 많고요.
피해자 가족들은 저만 보면 엎드려 울며 ‘그를 꼭 잡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사면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그래도 말일세. 그 남자는…
그림을 너무 잘 그린단 말이야. 이걸 보게. 그는 인류의 보물이라고.”
1610년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에서 오간 대화이다.
지금 들으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축구선수가 공을 잘 찬다고,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살인을 용서해주자는 것과 똑같은 얘기이다.
사실 500여년 전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식의 사면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카라바조(1571∼1610),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사망한 후 7년 후인 1571년 이탈리아에서
또 다른 미켈란젤로가 탄생한다. 카라바조의 본명이 미켈란젤로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살다가는 동명이인의 거대한 그림자에 파묻힐 게 뻔했다.
그는 이름을 카라바조라고 바꿨다.
카라바조는 그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동네 이름이다.
그는 살인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신앙심을 품고 있던 화가이기도 했다.
이 모순된 존재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황홀경의 막달라 마리아'를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죄를 짓고 회개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나는 카라바조 자신의 영혼을 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참회의 눈물이 느껴졌다.
화려한 보석도,
향유병도 없이 오직 순수한 회개만이 그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카라바조는 자신의 죄책감을 이 성녀의 모습에 투영했으리라.
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짊어진 채,
그는 붓끝에 자신의 참회를 담았던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었다.
잘린 골리앗의 머리에서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가혹한 심판이었고,
동시에 구원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이었다.
다윗의 착잡한 표정에서 나는 승리의 기쁨이 아닌,
깊은 연민과 슬픔을 읽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교만과 폭력성을 골리앗으로,
그것을 심판하는 겸손한 양심을 다윗으로 그려낸 것이다.
'성 토마스의 의심'에서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토마스의 손가락이 예수의 상처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장면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신성했다.
카라바조는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의심을 통해 더욱 확고한 믿음에 도달하려 했다.
그의 그림 속 사도들은 귀족이 아닌 평범한 노동자의 모습이었고,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은 현실 그 자체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카라바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삶은 빛과 어둠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바로크 그림과 닮아있었다.
천재적 재능으로 바로크 회화의 문을 열었지만,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진 어두운 과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진실,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만을 그렸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나는 인간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본다.
죄를 짓고도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
의심하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존재,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는 존재 말이다.
그의 붓끝에서 흘러나온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영혼의 고백이었고,
참회의 기도였다.
진정한 예술은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태어나는 것임을...
이탈리아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는 말했다.
“카라바조가 없었다면 리베라, 베르메르, 조르주 드 라 투르,
그리고 렘브란트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마네의 그림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