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그림이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위로가 된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멋있지도 예쁘지도 않은 그의 그림 앞에서 현대인들이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는,
그 화폭에 담긴 것이 완벽한 아름다움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뭉크는 평생을 고통과 함께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하나씩 잃는 절망,
병마와 싸우는 육체적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주는 정신적 상처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그는 경험했다.
그리고 그 고통들은 단순히 지나가는 순간이 아니라 그의 평생을 짓누르는 무게가 되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자화상이었다.
어두운 배경, 일그러진 형태,
절규하는 인물들은 모두 뭉크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것이었다.
'멜랑콜리'라는 작품 제목처럼,
그리스어로 '검은 담즙'을 뜻하는 이 단어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했다.
우울과 불안, 그리고 끝없는 공포가 그의 일상이었다.
특히 가슴 아픈 것은 연인 툴라와의 이별 이야기이다.
뭉크에게도 달콤한 사랑이 찾아왔지만,
그는 자신의 정신적 불안과 우울증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헤어지는 고통을 선택한 것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선택이 그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는 것은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뭉크에게 기억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은 추억이 되어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지만,
그에게는 형벌과도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져야 할 상처들이 오히려 더욱 선명해질 때,
잊어야 할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날 때의 괴로움을 상상해보라.
뭉크에게는 망각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치료였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었다.
그는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견디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가슴속 상처를 터놓듯이, 억눌린 감정을 토해내듯이 캔버스에 자신을 쏟아부었다.
'절규', '불안', '카를 요한 저녁 거리' 같은 작품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뭉크의 그림이 현대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감정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닥치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외로움과 절망감 - 이 모든 것들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때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더 깊은 위안은 우리와 같은 상처를 가진 존재로부터 온다.
뭉크의 그림이 우리를 위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나만 이렇게 아픈 것이 아니구나',
'이런 고통도 예술이 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뭉크는 평생 지겹도록 자신을 괴롭혔던 공포와 우울,
외로움과 싸우며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걸작들을 남겼다.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던 것은,
그 고통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예술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그림이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는,
그것이 바로 뭉크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에드바르 뭉크의 연작 중 하나인 표현주의 그림으로,
핏빛의 노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하였다.
배경의 풍경은 노르웨이 오슬로(당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이케베르크 언덕에서 보이는 오슬로피오르이다.
작가가 생전에 붙인 제목은 <Schrei der Natur>(자연의 절규)이나
흔히 <The Scream>으로 알려져 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