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갤러리에서 김환기의 작품 앞에 선 한 중년부인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푸른 점들이 무수히 펼쳐진 화면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그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로 옆 벽에 걸린 다른 추상화 앞에서는 사람들이 당황스러워했다.
작품설명을 읽고 또 읽으며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같은 추상화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김환기의 작품에는 '별'이라는 우리가 아는 형태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작품에는 그런 단서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저 색과 형태만이 캔버스 위에서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점·선·면"이라는 추상미술 이론을 제시한 칸딘스키는 당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두고 "의미 없는 물감칠"이라고 혹평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추상화 전시장에서 "이게 그림이야?"라는 중얼거림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추상화는 정말 그림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이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림은 무언가를 닮은 것, 현실을 재현한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 같다"고 감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그림은 언제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추상화는 다르다.
그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느끼게 한다.
붉은 색면이 주는 강렬함,
구불거리는 선이 만드는 리듬,
점들이 이루는 조화 같은 것들 말이다.
이것은 마치 음악과 같다.
음악이 특정한 사물을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처럼,
추상화 또한 형태를 빌리지 않고도 우리 내면에 무언가를 전달한다.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50년간
"오로지 추상화만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영향으로 마크 로스코(1903-1970) 같은 추상 작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린버그의 이런 극단적 주장은 오히려 추상화에 대한 오해를 낳기도 했다.
추상화만이 우월한 예술이라는 편견 말이다.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겪으면서 예술가들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앤디 워홀이 비누 상자를 예술이라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는 이런 혼란 속에서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주제와 해석만 있으면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화장실의 변기는 그냥 사물이지만,
전시장에서 특정한 주제와 해석이 부여되면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추상화가 그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추상화는 전통적인 의미의 '그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예술이고, 우리 시대의 그림이다.
1960년대부터 다시 등장한 구상화 -
실재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물을 그대로 나타낸 그림 -
의 흐름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한때 추상화의 열풍 속에서 구상화를 그리던 작가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만의 길을 고집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더욱 다양한 예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미술사는 결국 미술 기법이 해방되어 온 역사다.
처음엔 진정한 미술이 아니라고 거부당했던 모든 표현 방식들이
결국 예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인상주의가 그랬고,
추상주의가 그랬으며,
개념미술도 그랬다.
모든 미술은 평등하고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추상화가 왜 그림일까?
그것은 그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예술의 경계도 함께 확장되었다.
추상화는 더 이상 '의미 없는 물감칠'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신을 담은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예술이 아니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전시장의 중년여성이 김환기의 작품 앞에서 보여준 그 자연스러운 미소처럼,
우리도 추상화 앞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설명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예술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
햇살이 좋은 어느 날,
갤러리에서 추상화 한 점과 마주했을 때를 상상해보자.
그 앞에서 "이게 뭘까?"라고 묻지 말고,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라고 물어보자.
그 순간 추상화는 비로소 당신만의 그림이 될 것이다.
https://youtu.be/eh1Bg7aVsjE?si=UhgGqEc34TsrnOo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