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상범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화선지 위에 펼쳐지는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작품 세계는

전통과 근대가 만나는 아름다운 접점이었다.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명작들은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초기작인 「무릉도원도」(1920년대)는 전통적인 이상향을 그린 작품으로,

스승 안중식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미 청전만의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구성감각이 엿보인다.

관념적인 도원경 속에서도 현실감 있는 자연 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그의 초기 화풍을 대표한다.


이상범의 20대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무릉도원’(1922년,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1964년의 일이다.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에 청와대로부터 문의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차관을 얻으러 간다.

그림 선물을 할까 하는데, 제일 잘 나가는 화가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당시는 서양화보다 동양화가 더 인기 있었다.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이 최고였다.

청와대는 그의 10폭 산수화 병풍을 60만원에 샀다.

당시 최고가였다.

표구한 그림을 전달하기 위해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다.

박 대통령이 그림 속 초가를 가리키며

“우리나라가 아직도 이렇게 못사는 줄 알면 어떡하지?”라며 걱정했다.

육영수 여사가

“우리 옛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깊이가 있으니 꼭 가지고 가시라”

라고 하자 표정이 밝아졌다.


20250814_185846.jpg 이상범, 설악산, 1946


1946년작 「설악산」은 청전 양식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서구적 사생법과 전통 필묵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이 그림에서,

설악산의 웅장한 기상과 섬세한 암석의 질감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통적인 먹의 농담 변화 속에서도 실제 산의 입체감과 원근감이 살아 숨 쉬며,

관념적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땅의 구체적 아름다움을 담아낸 대표작이다.


20250814_190753.jpg 고원 무림高遠霧林, 1968


1960년대 대표작인 「고원무림」은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된 후기 대표작으로,

청전 양식의 완성을 보여준다.

고원 위에 펼쳐진 숲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나무 하나하나의 개성과 전체적인 숲의 울창함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원경과 근경의 처리, 공간감의 구성이 절묘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그 숲속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20250814_191128.jpg 추경 산수


1970년 추경 산수는 청전의 만년 화풍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색채의 사용이 절제되면서도 풍부한 정서적 울림을 전해주는 이 작품은,

평생 우리 산천과 대화해온 화가의 깊은 성찰이 담긴 역작이다.


청전의 작품들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필묵법 위에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점이다.

그는 관념적 이상향이 아닌 우리나라의 실제 산천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단순한 재현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와 미감이 깊이 배어든 시정을 표현해냈다.


특히 그의 신문 삽화 작업 경험은 작품에 서사성과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40여 편의 연재소설 삽화를 그리며 익힌 구성력과 표현력이 후기 산수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단조로울 수 있는 산수화에 풍부한 이야기와 감정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에 완성된 '청전양식'은 한국 산수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전통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우리의 자연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표현해낸 그의 예술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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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l-drUuCe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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