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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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언어, 문화의 숨결

햇살 아래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동양인은 그 붉음을 생명의 고동과 다가오는 복으로 느끼며 미소 지을 테고,

서양인은 위험과 정지를 상징하는 경고색으로 인식해

무의식적으로 한 발 물러설지도 모른다.

이처럼 동서양의 색채 인식 차이는 단순한 시각적 차원을 넘어

문명의 깊이에서 우러난 세계관의 차이로 다가온다.


철학적 뿌리

동양에서 색(色)은 본질적으로 '빛(光)'과 '기색(氣色)'의

개념과 결합되어 있다.

한자 '色'은 '사람 인(人)'과 '마디 절(節)'이 결합된 형태로,

원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의 변화를 의미했다.

《예기》의 "화기가 있는 자는 반드시 부드러운 빛이 있다(有和氣者 必有愉色)"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동양에서 색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외부로 투사된 현상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의 'color'는 라틴어 'celare'(가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물체의 본래 색을 덮어 새로운 색을 드러내는 물리적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동양이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중시한 반면,

서양이 물질 자체의 속성을 분석하는 데 집중했음을 보여준다.



오방색(五方色)의 우주론

동양의 색 체계는 음양오행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목(靑)·화(赤)·토(黃)·금(白)·수(黑)의 다섯 색은 방위와 계절,

심지어 인간의 장기까지 상징하며 우주 질서의 시각적 표현으로 기능했다.

조선시대 군대 깃발에서 청색은 동방을,

백색은 서방을 나타냈으며,

아이들의 색동저고리는 상생(相生)의 원리에 따라 색을 배열해 악령을 막는다고 믿었다.

이는 색을 단독이 아닌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동양적 사유의 전형이다.



문화적 상징

붉은색은 동서양 모두 강력한 상징성을 지녔으나

정반대 의미로 해석된다.

중국에서 붉은색은 혼례복과 춘절(설) 장식에 사용되며

행운과 생명력의 상징이다.

이는 태양과 피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동짓날 팥죽의 붉은색이 귀신을 쫓는 힘으로 여겨졌다.

반면 서양에서 붉은색은 신호등과 재정적 손실(적자)을 나타내며 위험과 긴급성을 경고한다.


흰색의 차이도 극명하다.

서양의 신부 웨딩드레스는 순결을 상징하지만,

동양에서 흰색은 장례와 연결된다.

일본과 한국의 장례식에서 흰 옷은 애도의 색이며,

중국 전통극에서 흰 분장은 악역을 나타낸다.

이는 유교와 불교문화에서 죽음을 정화(淨化)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술적 표현: 여백의 철학 대 채움의 미학

동서양 회화의 차이는 색채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화가 원근법과 명암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면,

동양화는 여백(空白)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암시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하늘과 물의 공간은 백지로 남겨지며,

관람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이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불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형체가 있는 것(色)과 없는 것(空)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33.jpg 안견, 몽유도원도, 1447


반면 서양 미술은 물리적 색채의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발전했다.

루앙 제리지 사레 동굴 벽화(4만 년 전)에서 시작해,

르네상스 시기 원근법이 정립되고,

인상주의가 빛의 분해 실험을 시도하는 과정은 시각적 현상을

체계화하려는 서양의 집착을 드러낸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농축된 노란색의 물리적 강도를 통해 생명력을 표현한다면,

김홍도의 〈군선도〉에서 노란색은 왕권의 정신성을 상징하는 매개체가 된다.


Vincent_Willem_van_Gogh_128.jpg 고흐. 해바라기, 1888


김홍도의 군선도[郡仙圖]. 1776.jpg 김홍도의 군선도[郡仙圖]. 1776


생리적·환경적 요인

지리적 환경 또한 색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동양인은 푸른색 계열을,

서양인은 붉은색 계열을 더 선명하게 인식한다.

이는 유럽이 상대적으로 직사광선이 강한 고위도 지역이어서

색채 대비가 뚜렷한 환경에 적응한 반면,

동아시아의 흐린 날씨가 푸른 계열의 감도를 높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모니터 색온도 조절에서 동양이 9300K(푸른톤),

서양이 6500K(붉은톤)을 표준으로 삼는 것도 이러한 생리적 차이를 반영한다.


글로벌 기업들은 색채 해석의 차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맥도널드는 인도에서 포화된 붉은색을 배경으로 사용해 행운을 상징하지만,

스웨덴에서는 녹색과 흰색을 강조해 건강과 환경 친화성을 강조한다.

이는 같은 브랜드도 문화에 따라 색의 언어를 재구성해야 함을 보여준다.


현대적 충돌과 조화

주식시장의 색깔 코드는 동서양 인식 차이의 살아있는 증거다.

한국·중국 증시에서 상승은 붉은색, 하락은 푸른색으로 표시되지만,

뉴욕 증시에서는 정반대로 적용된다.

이는 붉음을 '활력'으로 보는 동양과 '위험'으로 읽는 서양의 사고가

데이터 시각화에까지 투영된 사례다.

유럽 디즈니의 실수 또한 교훈적이다.

자사 브랜딩에 보라색을 대량 사용했다가

유럽인들에게 '죽음'(가톨릭 문화에서 성금요일 상징색)으로 인식되어

마케팅을 급수정한 사례는 문화적 맥락을 무시한 색채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미국 주식시장 그래프
한국 주식시장 그래프


무지개 아래 하나된 인간의 눈물

동서양의 색채 인식 차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세계와

대화하는 방식의 다양성을 증명한다.

같은 노란색이 동양에서 황제의 권위를 수놓을 때,

서양에서는 유다의 배신을 낙인찍는 아이러니는

색 자체가 문제가 아님을 일깨운다.


중요한 것은 그 색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린 문화의 기억과 인간의 이야기다.

오늘날 글로벌 사회는 이러한 차이를 단순히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다양한 색채 해석이 창조하는 새로운 시너지를 모색해야 한다.

마치 무지개의 일곱 빛깔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선을 이루듯,

인류 문명도 각자의 색채 언어로 엮어낸 공동의 지평을 그려나갈 때이다.


"빛은 만국 공통이지만,
그 빛이 비추는 마음의 프리즘은
각자의 역사로 수놓아진다.
붉음이 기쁨이든 경고이든,
그것을 보는 눈빛엔
모두가 빛을 향한 동일한 갈망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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