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
그리고 그의 아내 오르탕스
"못났다, 못났어. 호호호…. 저 그림 속 여자 좀 봐. 정말 너무하지 않아?"
1907년 파리 가을 박람회. 세잔이 죽은 지 1년이 지났지만
그의 초상화 작품 앞은 여전히 여성 관객들로 붐볐다.
그림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 못생긴 여자 그림이 있는데 그 옆에 서면 누구라도 예뻐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앞을 약속 장소로 삼은 사람들이었다.
그림 속 여성의 표정은 우울하면서 냉정했고,
얼굴빛은 창백했다.
투박한 옷차림에 장신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인은 마리 오르탕스 피케,
세잔의 아내이자 가장 끈질긴 모델이었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도대체 왜 저런 식으로 그리는 거냐고.
오죽 아내가 싫으면 그랬겠냐고.
무식하고 성격 더러운데다 낭비벽도 심하다는 소문까지 더해져
그녀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그 무표정함은 과연 무엇인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그리고 늙어가는 그녀의 초상화를 차례로 펼쳐보면,
우리는 한 인간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그림에서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무감정하다.
사실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세잔이 그녀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책방 제본공으로 일하던 열아홉 살의 오르탕스와 사랑에 빠진 그는
아버지의 용돈이 끊길까 두려워 혼인 신고도 없이 동거를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결혼 사실을 숨기는 부자연스러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시집 식구들의 구박과 괴롭힘은 이어졌고,
세잔조차 그녀를 방어하지 않았다.
정식 혼인 신고를 한 것도 아들을 위한 유산 문제 때문이었다.
세잔은 말했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은 구성하는 것"이라고.
그는 자연을 원통, 구, 원추로 파악했다.
그의 화폭에서 인간은 하나의 '대상'이었을 뿐,
감정을 나누는 '대화자'가 아니었다.
아마도 세잔에게 고독은 예술가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친밀한 인간 관계가 대상 인식을 쉽게 한다는 것은
단지 '달콤한 낙관'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리라.
그런데도 오르탕스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모델로 남았을까?
세잔은 모델을 괴롭히는 화가로 악명이 높았다.
한 번 그렸다 하면 서너 시간은 기본이었고,
그림 하나를 위해 모델을 백 번도 넘게 부른 적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불같이 화를 냈고, 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오르탕스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이 모든 것을 견뎌냈다.
덕분에 세잔은 그녀를 통해 인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연구할 수 있었다.
그가 인간 형상을 그리는 데 있어 결정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돕은 것은 바로 그녀였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혼자 키우고,
밤에는 잠들지 못하는 세잔에게 책을 읽어주는 등 그의 멘탈 케어까지 맡았다.
그러나 세잔은 끝까지 그녀에게 고마워할 줄 몰랐다.
"내가 죽고 나서 오르탕스에게는 한 푼도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유언장까지 작성했다.
결국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아들을 통해 세잔의 유작들을 거액에 팔아넘기는 현명함을 보였다.
말년에는 스위스와 모나코에서 세련된 옷을 사고 카지노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오르탕스의 무표정함은 세잔의 예술적 방법론에 대한 응답이었는지 모른다.
화가는 대상에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았고,
모델은 화가에게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떤 침묵의 계약을 체결했던 것은 아닐까.
세잔의 그림에는 내편도 네편도 없다.
주체와 객체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그의 화폭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깊은 신뢰를 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늘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고요함 속에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깊은 이해와 인내가 스민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없었다면 세잔의 예술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