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자, 크레이그-마틴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갤러리에 들어서니,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빨간색 우산이 화폭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파란색 코르크스크류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선 몇 개와 원색으로만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작품과의 첫 만남이었다.


1.jpg Michael Craig-Martin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크레이그-마틴은 1941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평생을 예술과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예술 여정은 여느 화가들과는 사뭇 달랐다.

붓과 물감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대신, 그는 '생각'을 그렸다.

개념미술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AA.29632395.1.jpg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 참나무: 유리 선반 위 그 물잔, 참나무로 보이는가


1973년, 그가 32세였을 때 만든 작품 하나가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참나무(An Oak Tree)』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사실 물 한 잔이었다.

그저 평범한 물 한 잔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이것은 참나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떻게 물이 나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바로 그것이 크레이그-마틴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우리가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의 간극,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던 것이다.


20220423055713_rpimmiee.jpg Untitled (desire), 2008


그러나 크레이그-마틴의 진정한 영향력은 작품보다도

교육자로서의 역할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가르치며,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영국의 젊은 작가들(Young British Artists)'을 키워냈다.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크레이그-마틴이 심어준 '다르게 보는 법'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20220423060525_quzffewa.jpg Untitled (take away cup), 2012


세월이 흘러 그의 작품 세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복잡한 개념 대신 일상의 사물들이 그의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우산, 코르크스크류, 의자, 그리고 시대가 변하면서 노트북과 스마트폰까지.

하지만 이것들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었다.

각각의 사물은 마치 살아있는 듯 선명한 색채로 화폭 위에서 춤을 췄고,

절제된 선 안에 담긴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들이었다.


2323.jpg Les Meninas II, Private Dancer, 1984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들이 사실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아침에 일어나 우산을 챙기고,

와인을 따며,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여는 그 모든 일상이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크레이그-마틴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고, 바로 우리 곁에 있다고.

오늘도 어디선가 그는 캔버스 앞에 서서 일상의 사물들과 대화하고 있을 것이다.

80대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예술가란 나이를 먹어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질문을 잃지 않는 사람임을 새삼 느낀다.


그리고 그가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선물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예술을 발견할 수 있는 눈,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마음.


20220423060104_slqwrpxv.jpg Zoom, 2020


https://youtu.be/e-sMfjXv-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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