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1865년 파리 살롱의 전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한 그림을 향해 군중이 모여들었고,
경멸과 조롱, 분노의 목소리가 난무했다.
관란객은 그림을 찢어버리려고까지 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가 세상에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작가의 그림이 아니라,
서양 미술이 수백 년의 관성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성벽에 내던져진 돌멩이와 같았다.
그 충격파는 단순한 도발을 넘어,
예술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미술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9세기 중반 파리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군주제와 공화제가 교차하고 혁명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이 시대에 예술가들은 저마다 사회와의 관계를 고민했다.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열정을 알레고리로 승화시켰고,
쿠르베는 노동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러나 마네의 관심사는 달랐다.
부르주아 신사였던 그는 “오늘날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는 것”에 더 집중했다.
그의 초기 작품 『튈르리 정원의 음악』가 보여주듯,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풍경을 담아내는 데 열중했다.
『올랭피아』를 그릴 때도 그는 단순히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작품이 조롱받자 그는 크게 상처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결코 누드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은 신화와 종교로 위장된 나체로 가득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올랭피아』와
구도와 소품이 유사함에도 칭송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곳의 여인이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고대의 여신이라고
스스로를 속임으로써 관음증적인 시선을 합리화해 왔던 것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에로틱한 그림은
부부의 성생활과 출산에 도움이 된다 하여 침실 장식용으로 종종 주문되었다.
여인의 발치에 웅크린 개는 배우자에 대한 충실함을 뜻하며,
뒷배경에 옷장을 뒤지는 소녀를 내려다보는 하녀는 모성을 상징한다.
여인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장미와 창가에 놓인 도금양은 비너스의 상징으로서,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부부의 영원한 유대를 의미한다.
요염한 자세로 기대 누운 비너스는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다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완벽한 아내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르네상스 걸작에는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관한 흥미로운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림 속 여인은 비너스가 아니고,
사실은 당시 베네치아의 유명한 매춘부이자 티치아노의
모델이었던 안젤라 델 모로(Angela del Moro)다.
그녀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손자 이폴리토 데 메디치, 티치아노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교제했다.
티치아노의 친구이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그녀를 베네치아 최고의 창부이며,
‘자신의 얼굴에 예의의 가면을 쓰고 음탕함을 숨길 줄 아는 여자’라고 언급했다.
작품의 제목도 원래는 그저 ‘나체의 여인’이었다.
티치아노는 이폴리토 데 메디치를 위해 순전히 쾌락적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소유주가 요절하자 그림은 우르비노 공작에게 팔렸고,
16세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여인의 정체성을 비너스로 규정함으로써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문제는 마네가 이 ‘위장’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모델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 각진 어깨, 생생하게 묘사된 리본과 실내화.
이 모든 것은 그림 속 여인이 신화의 존재가 아닌,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올랭피아’라는 이름을 가진 한 성 노동자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고양이, 꽃다발, 흑인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테일은 이 환상을 거부하고
현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작용했다.
당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나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왜 마네의 올랭피아를 그토록 비난했을까?
흑인 메이드는 아프리카인을 시종으로 부리던 부르주아들의 이중성을,
침대 아래 검은 고양이는 여성의 성적 상징으로 창부 후원 문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검은 고양이는 프랑스에서 성적 은유(여성의 음부, 성교 대상으로서의 여성)로
통했기에 극도의 분노를 샀다.
마네는 이를 통해 겉으로는 지성인 행세하지만 속은 퇴폐적이고
환락에 빠진 파리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된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한마디로 '페르소나'라는 가면뒤에 숨은 자신들의 '자아의 욕망'을 들춰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랭피아』가 가져온 미술사적 전환의 핵심이다.
르네상스 이후 약 400년간 서양 미술의 최고 목표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 캔버스에 ‘이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원근법, 명암, 색채 이론은 모두 이를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마네는 이 전통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깊이를 만들어내는 체크무늬 바닥 대신 검은 배경을 깔았고,
부드러운 음영으로 육체를 조각하는 대신
강렬한 윤곽선과 평평한 색면으로 대상을 압축했다.
이 새로운 시각은 당시 파리에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 우키요에 판화 -
일본의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에도 시대에 성립된,
당대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려낸 풍속화의 형태를 말한다. -
의 영향이었다.
깊이와 입체감 대신 선과 평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동양의 미학은
마네에게 기존의 관습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올랭피아』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현대 미술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만들었다.
이 그림에서 시작된 평면성과 직설적인 시선은 이후 인상주의를 거쳐,
입체주의,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의 단초가 되었다.
마네는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의 예술적 진실만을 따라감으로써 의도치 않게 가장 위대한 혁명가가 되었다.
그의 『올랭피아』는 예술이 어떻게 동시대의 편견과 충돌하고,
그 충돌 자체가 시대를 초월한 가치로 남아 다음 세상을 이끄는지 보여주는 불멸의 증거다.
그것은 기존의 벽을 깨고 현실의 어두운 빛까지도 포용하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