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어두운 시대의 한복판에서도 꽃을 그렸던 화가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절망과 불안을 화폭에 담아낼 때,
미쉘 앙리(1928-2016)는 오히려 더욱 찬란한 색채로 희망을 노래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아름다운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미쉘 앙리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 황홀한 색감이다.
정열적인 빨간 양귀비부터 레몬 껍질처럼 싱그러운 노란 꽃잎까지,
그의 팔레트는 자연이 선사하는 가장 순수한 원색들로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은 꽃에서 나온다"고 말했던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색채들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반 고흐가 즐겨 사용했던 인파스토 기법을 통해 나이프로 직접 올려진 물감들은
꽃잎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듯한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이다.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실제 풍경 앞에서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림을 그렸다면,
미쉘 앙리는 오직 기억만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내 눈이 메모를 한다. 그대로 그 기억을 바로 눈으로 실행한다"는 그의 말처럼,
어떤 사전 스케치도 없이 기억 속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베네치아는 실제 베네치아에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황홀하게 반짝이는 윤슬과 따뜻한 저녁놀은 모두 작가의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상상의 공간이다.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창문 구도다.
꽃다발이 놓인 창틀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가의 가장 소중한 어린 시절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 미쉘 앙리에게 창문 밖으로 보이던 풍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그는 평생에 걸쳐 그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투명한 유리창과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의 섬세한 표현은
마치 실제 창문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훈장을 받으며 일찍이 명성을 얻은 그였지만,
미쉘 리의 진정한 위대함은 시대적 어둠을 거부하고 아름다움을 택한 용기에 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그는 빛과 색채로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꽃들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라,
절망적인 현실을 견뎌낸 인간 정신의 승리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