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미술관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함께 보다 보면,
같은 '공간'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차이를 느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앞에 서면 마치 창문을 통해
그 장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확한 원근법이 만들어낸 3차원의 환상은 우리의 눈을 속여
평면 위에 깊이를 느끼게 한다.
반면 동양의 산수화 앞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화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백은 단순히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서양 미술은 르네상스 이후 물질세계를 정확히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했다.
중세의 종교적 상징성을 벗어나 인간의 눈으로 본 현실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고자 했다.
원근법의 발명은 이러한 열망의 결정체였다.
하나의 시점에서 본 세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평면에 재구성하는 기법은,
마치 사진기의 렌즈처럼 인간의 시각을 기계화했다.
이후 카메라의 등장, 복제 기술의 발달,
그리고 컴퓨터까지, 서양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을 더욱 정확히,
더욱 실감나게 재현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동양의 공간 개념은 전혀 다른 철학에서 출발한다.
도가사상에서 말하는 '무(無)'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생성될 수 있는 근원적 공간이다.
노자가 "천하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그 무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충만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유교의 중용사상 역시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은 암시"로서의 중(中)을 말한다.
불교의 공(空) 사상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형상과 공허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
색이란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공의 본질이기 때문에 역시 공하다.
따라서, 색과 공의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색을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동양회화의 여백은 태어났다.
여백은 그림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조형요소다.
그곳에서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며,
새가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공간,
그려지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세계가 바로 여백 속에 있다.
작가의 붓이 닿지 않은 곳에서 오히려 가장 큰 울림이 일어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현대에 이르러 이 두 전통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서양 현대미술은 절대적 공간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입체파는 하나의 시점을 거부하고 다중 시점을 도입했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제시한 4차원 공간에 매료되었다.
한편 동양의 작가들도 서구 회화의 표현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간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결국 공간에 대한 동서양의 서로 다른 접근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포착하려는 분석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는 직관적 통찰이다.
전자가 과학과 기술 문명을 발전시켰다면,
후자는 정신적 깊이와 내면의 평화를 추구해왔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시각의 조화일지도 모른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메마름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동양의 여백 사상이 새로운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동양 역시 서양의 합리적 사고와 기술적 성취를 통해
더욱 풍성한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미술 속 공간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이다.
그 철학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추구해온 진리와 아름다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