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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연대의 예술가, 신민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2025년 3월,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인 '2025 아트 바젤 홍콩'에서

전 세계 신진 작가 중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아트바젤 홍콩에서 MGM 디스커버리즈 아트 프라이즈의

첫 수상자로 한국 작가 신민의 이름이 불렸다.

이 상은 새롭게 제정된 세계적 미술상으로,

신민은 한국인 최초로 이 영예를 안았다.


수상작인 '유주얼 서스펙트'와 '세미(世美)' 시리즈는

패스트푸드점과 대형 카페에서 일하며 느낀 감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신민 작가는 생계를 위해 서비스직 노동 현장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검정 머리망을 쓴 조각품들은

한국의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를 상징한다.


1.jpg 아트바젤 홍콩의 P21갤러리 부스에 신민 작가 작품


머리망은 신민 작가가 선택한 강력한 은유다.

아무리 머리를 질끔 묶고 꽁꽁 싸매어도 머리망 사이로

빠져나오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발견되면 매장은 CCTV를 돌려 범인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은 서로를 의심하는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유주얼 서스펙트' 작품에는 바로 이런 씁쓸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에는 '누구야? 너 아니야? 너 맞지?'라며

서로를 의심하는 시선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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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생인 신민 작가는 약자, 특히 여성에 대한 긴 폭력의 역사와 그 근본을 탐구해왔다.

초기 작품인 'Crying Women' 연작에서는 눈을 부릅뜨거나 눈물 흐르는 여성의 얼굴을 형상화하여,

말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을 형상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개인의 정체성 탐색을 넘어 여성 집단이 겪는

침묵과 억압을 대변하는 조각 언어로 기능한다.


3.jpg 울고 있는 여자들(2006-2010)


4.jpg 울고 있는 여자들(2006-2010)


이후 신민은 자신이 몸소 겪은 서비스직 노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여성에게 부과하는 '청결함', '단정함', '친절함'의

강요를 비판하는 작업으로 확장해 나갔다.


2022년 개인전 《Semi 世美》에서는 프랜차이즈 노동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영어 닉네임 '세미'를 모티프로 현실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작고 익살맞은 조각 군상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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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은 찰흙으로 원형을 만들어 그 위에 10겹 이상 종이를 덧발라 캐스팅하고,

그 위에 연필과 크레용으로 채색하여 작품을 완성시킨다.

버려진 포장지와 종이 포대를 수집해 사용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재료 자체가 이미 노동 현장의 흔적을 담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는 종이와 연필의 유한한 물성은 신민의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국의 노동 현실, 특히 서비스직 여성들이 겪는 감시와 통제,

그리고 그 안에서 싹트는 불신의 구조를 담은 신민 작가의 작품은

전 세계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작품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은 것은 이러한 문제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민 작가는 단순히 노동의 고통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작품을 통해 노동자들 간의 연대와 공감을 이야기한다.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드는 시스템 속에서도,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작고 부드러운 종이로 쌓아올린 그의 조각들은 단단한 여성 연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적 미술상 수상은 신민 작가에게 새로운 시작이다.

그는 앞으로도 한국 사회 내부의 감정 구조를 조형 언어로 변환해내며,

국제 무대에서 현실의 약자들과 연대하는 조각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통쾌함을 주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노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7.신민_생리휴가_5x15cm_종이에_볼펜_2020.jpg 신민, 생리휴가, 5x15cm, 종이에 볼펜, 2020


https://youtu.be/KuGrV0ADz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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