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한가위 보름달은,
마치 오래된 은쟁반에 고인 맑은 물처럼,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은 사라진 옛 추석의 풍경들이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 시절 추석은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말이 어울리는,
알찬 보름달 같은 명절이었다.
지금처럼 개인적인 휴가나 여행의 개념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하나로 모이는 가장 소중한 날이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모든 TV 프로그램은 사라지고,
온통 귀향 길 교통 상황 생중계로 도배가 되었다.
지금은 KTX가 있어 쉽게 생각되는 서울과 대전 구간이 당시에는
최악의 정체 구간으로 꼽혔다.
오직 경부고속도로 하나만이 전부이던 시절,
요즘이라면 두 시간이면 갈 거리가 무려 열네 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추석이면 회자되는 대표적인 추억이다.
버스 터미널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지금은 아이돌 콘서트 티켓보다 구하기 어렵다는 추석 기차표가 화제가 되지만,
그때는 인터넷 예매란 없었다.
사람들은 돗자리나 신문지를 깔고 이틀 밤을 새우며 표를 기다렸다.
밀려오는 사람들 틈에 끼여서 졸기도 하고,
길에 갇힌 차 안에서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볼일을 보던
그 절박한 풍경들까지도,
지금 생각해보면 고향에 가고 싶은 일념 하나로 뭉친 사람들의 에너지가
느껴져 오히려 훈훈하게 기억된다.
요즘은 해외로 여행을 즐기러 가는 인파로 공항이 북적이는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고 난 뒤 텔레비전 앞은 온 가족이 모이는 또 다른 장소였다.
지금은 시청률 10%만 넘어도 대박이라고 하는데,
그 시절 씨름 방송은 무려 68%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만기, 강호동 선수의 앳된 모습이 스크린을 수놓을 때,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응원하던 함성소리는
명절의 흥을 한층 더 뜨겁게 만들었다.
TV에는 성룡(일명: 추석 삼촌)의 홍콩 영화가 종일 틀어져 있었고,
그 소란스러운 액션씬 속에서도 어른들은 졸고,
아이들은 신나게 따라 하며 웃었다.
지금의 추석은 교통도, 예약도, 모든 것이 너무 편리해졌다.
하지만 가끔은 그 느리고, 불편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던
옛날 귀향길이 더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힘든 길이었지만,
그 표정들은 모두 들떠 있었고,
부모님을 뵈러 가는 그 얼굴들마다
어루만져주고 싶을 만큼 푸근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은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 아닐까.
달빛에 스민 그 시절의 추억들은,
아직도 내 가슴에 고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