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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 담긴 깨달음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사찰의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황금빛 부처님의

모습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맞이한다.

그 뒤편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불화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수행자들의 신심과

깨달음을 향한 염원이 고스란히 담긴 신앙의 결정체다.


불화는 불교의 교리, 부처의 모습, 경전 내용을 그린 종교적 그림이다.

인도에서 불교 성립과 함께 시작되어, 한국에는 4세기경 중국을 통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신라 화가 솔거, 고구려 담징의 기록 등 다양한 유산이 남아 있다.


법륭사 제6호벽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부분도). 관음보살의 얼굴이다. 고려시대의 불화에서처럼 철선묘(鐵線描)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수월관음도39(고려 후기), 비단에 색, 110.0*57.7㎝, 일본 단잔진자談山神社 소장


고려 수월관음도, 동양 회화의 정수

고려시대의 불화는 세계 미술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중에서도 일본 교토 다이토쿠지에 소장된 《수월관음도》는 고려 불화의 백미로 꼽힌다.

14세기에 그려진 이 작품은 바위 위에 앉아 버들가지를 든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달빛이 비치는 바다 위,

백의를 입은 관음보살은 한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중생을 내려다본다.

투명한 보석 같은 영락 장식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듯 섬세하게 표현되었고,

흰 옷자락의 부드러운 주름은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듯하다.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우러러보는 장면은

구도자의 간절함을 보는 이의 가슴에 전한다.

고려 불화 특유의 세련된 금니와 은은한 채색은 신비로운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보는 이를 피안의 세계로 이끈다.


송광사 영산전 영산회상도(1725년, 의겸스님 작, 보물 제1368호


조선의 영산회상도, 설법의 장엄함

조선시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파하시는 부처님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보살, 제자, 천인들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들은 법당의 주불화로 봉안되어

신도들의 예배 대상이 되었다.


특히 송광사 영산전의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배치된 제자들과

보살들의 모습은 질서 정연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붉은색과 녹색, 금색이 조화를 이루는 화려한 색채는

극락세계의 장엄함을 표현한다.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 하나하나가 개성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현대로 이어지는 불화의 맥

불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미술품이 아니다.

그 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 그리고 그림을 그린 화승의 수행이 함께 녹아있다.

한 점의 불화를 완성하기 위해 화승들은 몇 달, 때로는 몇 년을 기도하며 정성을 다했다.

붓을 들기 전 목욕재계하고, 한 획 한 획에 염불을 담아 그렸다.


오늘날 불화는 사찰을 넘어 현대 미술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조이락 작가는 고려불화 재현작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명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조이락, 어화둥둥 아가야, 2021


엄기원은 고려와 조선 불화를 모사하고 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변형하여

새로운 불화를 창안하려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신중탱크’는 신중을 현대적 군인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 조선 신중탱은 조선 후기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神衆)을 그린 불화(탱화)로,

주로 사찰 법당에 봉안되어 불교의 호법신앙을 상징한다.

신중탱화에는 대예적금강신, 제석천, 대범천, 동진보살, 팔부신장, 십이지신장 등

다양한 호법신이 등장한다.

이들은 본래 인도 재래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불교의 호법신으로 수용되었다.


엄기원의 ‘신중탱크’. 조선 신중탱의 무기를 든 모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부안 내소사 신중탱


고려 불화기법으로 현대사회를 풍자한 김훈규작가

그림엔 토끼, 돼지, 호랑이, 원숭이, 물고기 등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가 와글와글하다.

색채도 현란하다. 언뜻 귀여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마주하기 불편한 요지경 세상이 보인다.

한곳에선 미친 듯이 쇼핑에 몰두하고, 또다른 곳에선 탱크가 전진하는 풍경,

나란히 앉아 각자 휴대폰에 정신 팔린 동물들이 딱 요즘 우리네 모습인 듯하다.


김훈규, Fitting Room No.7, 비단에 채색, 2022


이들 작가는 전통 불화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불화가 더 이상 법당 안에만 머물지 않고 미술관과 갤러리로 나아가는 것은,

그 안에 담긴 깨달음과 자비의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법당에서든 전시장에서든,

불화를 마주할 때 우리는 천 년을 이어온 구도의 길과 마주하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의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127375_67711_041.jpg 김석곤 작 ‘약사불회도’


https://youtu.be/Biy8M6bn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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