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 한 소년이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미술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 소년은
그러나 붓을 잡으면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보인 빼어난 재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고,
비공식 미술양성기관을 전전하며 독학으로 익힌 그의 솜씨는
곧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29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며
화단에 등장한 이인성(1912~1950).
그로부터 해방까지 그는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놓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전일본수채화회전과 제국미술원전에서도 상을 받았고,
1936년에는 선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까지 지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의 동시대 화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행보였다.
이인성의 그림은 서양화였지만 그 속에는 한국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었다.
수묵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서양의 인상주의를 한국적 감성으로 재해석해냈다.
색채와 빛의 표현,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선의 산천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고갱', '한국의 세잔'이라 불렀다.
서양 기법을 빌렸지만 그가 그려낸 것은 분명 한국의 풍경이었고,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해방 후 그는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6·25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죽거나 납북되거나 실종되었지만,
이인성은 살아남았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에도 그는 교단에 섰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화가.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0년 11월 어느 날,
술집에서 치안대원과 사소한 시비가 붙었다.
격한 감정 싸움 끝에 이인성은 총에 맞았다.
서른아홉의 나이, 한창 원숙미를 더해가던 화가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소설가 최인호는 이렇게 썼다.
"해방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림 그리는 환쟁이는
치안대원의 자존심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척박한 시대였다.
예술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총과 권력만이 힘을 갖던 시대.
이인성의 죽음은 단순히 한 화가의 비극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존중하지 못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이인성이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빛을 발한다.
한국적 인상주의의 토착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운 결합.
그의 화풍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른바 '이인성류'라 불리는 독특한 화풍의 계보를 만들어냈다.
비록 일제 치하의 관변 전람회를 통해 성장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당시 독학 화가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을 외면할 수 없다.
개인전을 열 화랑도 없고, 미술 시장도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예술가를 오늘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이인성. 짧은 생을 살다 간 천재 화가.
그는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격랑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였다.
그의 캔버스에 담긴 한국의 빛과 색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 시대에도 예술은 살아남는다고, 아름다움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해당화
한용운 詩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였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습니다 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였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