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한국 전통 보자기를 작품의 중심에 둔 두 명의 예술가가 있다.
1971년 서울 태생의 이하주(Leeah Joo)와 1957년 대구 태생의 김수자.
이들은 각기 다른 세대,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지만,
한국 전통 천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하주: 환영 속에 담긴 기억
조각가 아버지와 삽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열 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하주에게 보자기는 개인적 기억의 상징이다.
인디애나 대학과 예일 미술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녀는
철저하게 회화의 전통 안에서 작업한다.
그녀의 '포자기(Pojagi)' 시리즈는 딸의 첫 한복이 화려한 비단 포자기에 싸여
도착했던 경험에서 출발했다.
극도로 작은 붓을 사용해 초현실적인 사실성으로 보자기를 묘사하는
그녀의 작업은 천의 주름, 색상의 미묘한 변화, 직물의 질감까지 세밀하게 재현한다.
대표작 〈Red Bojagi〉(2015)는 붉은 비단 보자기가 무엇인가를 감싼 채 놓여 있는 모습을 담았다.
캔버스 위에 고정된 천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탐구하는 것은 보자기 그 자체의 형태와 색채,
그리고 극사실적 재현으로 달성되는 회화의 마법이다.
또 다른 시리즈인 '파르하시우스(Parrhasius)'는
고대 그리스 화가들의 대결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커튼의 사실적 묘사를 통해 회화적 환영을 탐구한다.
현재 코네티컷주에 거주하며 서던코네티컷주립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녀는
폴록-크래스너 재단 등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김수자: 보따리에 담긴 인류의 여정
김수자에게 보따리는 단순한 천이 아니라 삶 자체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수학한 그녀는 회화에서 출발했지만,
1990년대부터 보따리를 주제로 한 설치,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으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표작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1997)는
헌 옷과 이불을 가득 실은 트럭에 작가가 올라타 한국의 도시를 달리는 퍼포먼스로,
이주와 실향을 다룬다.
〈바늘 여인〉 시리즈(1999-2001)는 도쿄, 상하이, 델리 등 세계 주요 도시의 인파 속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작가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작업이다.
작가는 자신을 바늘로, 자신의 몸을 보따리로 인식하며,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행위를 바느질에 비유한다.
2006년 마드리드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선보인
〈숨: 거울 여인〉은 건축 공간 전체를 하나의 보따리로 만든 작업이다.
유리 궁전의 벽에 반투명 필름을 붙여 무지개 빛을 연출하고,
바닥 전체에 거울을 깔아 관람객이 명상하고 호흡하며 작품과 하나가 되도록 했다.
2024년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에서 열린 〈호흡-별자리〉 전시에서는
미술관의 돔을 달항아리처럼 완벽한 보따리로 완성시켰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움직이고, 호흡하고, 변화한다.
싸고 묶는 행위는 내부와 외부, 나와 타인을 잇는 상징적 행위가 된다.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는 그녀는 2017년과 202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회화와 퍼포먼스: 두 개의 언어
이하주와 김수자는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
이하주는 회화의 전통 안에서 보자기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하며
관람자의 시각적 경험을 자극한다.
그녀의 작품은 조용하고, 내밀하며, 개인적이다.
캔버스 앞에 선 관람자는 천의 질감과 색채에 매료되면서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상상한다.
반면 김수자는 개념미술과 퍼포먼스의 언어로 보따리를 다룬다.
그녀의 작품은 거대하고, 공적이며, 철학적이다.
보따리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매개체다.
싸고 묶는 행위, 그것을 들고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은 현대인의 이주, 정체성, 소속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확장된다.
이하주의 보자기가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정물이라면,
김수자의 보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의 초상이다.
하나는 붓으로 천천히 쌓아 올리는 인내의 예술이고,
다른 하나는 몸으로 직접 걷고 호흡하며 만들어가는 체험의 예술이다.
보자기 하나에 담긴 두 개의 세계.
이것이 바로 두 작가가 현대 미술사에 남긴 독특한 족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