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화폭, 변월룡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1916년 연해주의 한인촌, 그곳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카레이스키(Koreysky).

조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부르던 이름이다.

변월룡(1916~1990)은 그렇게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호랑이 사냥꾼인 할아버지는 어린 그에게 늘

"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쫓아 연해주를 유랑했지만,

너만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라!"라고 생전에 강조했다.

손자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병진년 용띠 해 달밤에 태어났다고

월룡(月龍)으로 지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화상


가난했지만 재능은 숨길 수 없었다.

한인촌 사람들은 소년의 그림에서 미래를 보았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그를 유학 보냈다.

공동체의 희망을 한 몸에 짊어진 채, 그는 붓을 들었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령이 떨어졌다.

17만 명이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그 참혹한 이주의 물결 속에서 변월룡만이 살아남았다.

그림이 그를 구했다.

예술가라는 이유로, 그는 레닌그라드에 남을 수 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동족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만 남아야 했던 그 죄책감이.


1947년 레핀미술대 졸업심사를 받는 변월룡.그는 '조선의 어부들'로 러시아 최고의 레핀미술대를 수석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세계 3대 예술학교인 레핀미술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아시아계 최초였다.

디아스포라의 아들이 서구 예술의 심장부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붓끝에는 고향의 흙내음이, 어머니의 체온이 묻어 있었다.


1954년에 그린 무용수 최승희의 초상화


한국전쟁 후, 변월룡은 1년간 평양에 머물렀다.

조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북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렸고,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화도 남겼다.


한복을 입고 붉은 부채를 든 최승희의 모습을 그린

1954년 작 ‘무용가 최승희 초상’은

샘처럼 솟아나온 붉은 색깔과 몸짓 율동의 하모니를 살려내

사실주의 화풍의 진수를 보여준다.

변 화백은 평양 체류 시절 최승희를 비롯해

화가 배운성과 문학수, 문학인 홍명희 등

당대 유명인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아내 빈약한

한국 서양미술의 토양을 더욱 풍성하게 가꿨다.


20251116_105745.jpg 햇빛 찬란한 금강산, 캔버스에 유채, 78×59cm, 1953


하지만 북한의 귀순 요구를 거절했다.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 대가는 혹독했다.

다시는 조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그는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AKR20190417162200005_03_i_P4.jpg 변월룡, 레닌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다!, 동판화 Etching, 49.3×91.5cm, 1964


그래도 그는 그렸다.

북쪽 끝 레닌그라드에서,

붓을 들 때마다 조국을 그렸다.

그리움이 그의 물감이었고,

어머니의 얼굴이 그의 고향이었다.


20251116_110031.jpg 변월룡의 유화 '어머니'


1985년,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한복 입은 어머니를 그렸다.

그림 아래 옹기종기 한글로 '어머니'라고 적었다.

평생 러시아어로 살았지만, 마지막 언어는 한글이었다.


변월룡은 떠났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돌아왔다.

멀고 먼 여정 끝에 고국으로.

디아스포라의 땅에서 한 번도 조국을 잊지 않았던 화가.

그의 화폭에는 지워지지 않는 고향이 있었다.

우리는 그제야 그를 기억한다.

너무 늦게...


dse_2016020509570779615753.jpg 조선의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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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vP24dN-Z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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