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제임스 앙소르(1860 - 1949)의 1899년 작 '가면이 있는 자화상' 을 보면,
화폭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배경의 빨간색이 핏빛처럼 보이고 둘러싼 가면들로부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그림 중앙에 선 화가는 꽃장식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자신을 에워싼 50여 개의 기괴한 가면들 속에서 유일하게 맨얼굴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예술가의 절규이자, 세상과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다.
당시 39세의 앙소르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화가였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듯,
앞날이 보이지 않던 앙소르가 하루하루를 그저 죽지 못해 살았던 시절,
그의 그림은 "쓰레기같은 그림"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어머니는 매일 "관광객들한테 팔 수 있는 돈 되는 그림이나 그려!"라며 잔소리했다.
앙소르는 스스로를 광기의 바다 속에서 온전함을 지향하는 유일한 피조물임을 제시한다.
가면들은 끊임없이 화가를 조롱하고 비웃지만,
화가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무방비상태로 혼자 맨 얼굴을 드러낸 앙소르의 모습을,
가면들은 금세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하다.
그러나 말없는 그의 응시 속에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다.
가면은 앙소르의 유년기부터 익숙한 소재였다.
외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자신의 작은 작업실 바로 밑에 위치했던 곳에
마스크를 비롯한 축제용품을 파는 가게를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앙소르가 화폭에 담은 가면들은 단순한 카니발 소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추악함과 허위의식을 상징하는 은유였다.
가면의 속성은 두 가지 은유를 포함한다.
하나는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를 숨기고 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으면 결국 가면과 합쳐져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앙소르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그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이 추악한 가면들로 표현했다.
구세주를 몰라본 대중의 무지함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듯이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몰라보는 대중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앙소르는,
자신을 순교자로 여겼다.
그는 가면을 쓴 무리들 속에서 홀로 진실을 말하는 예언자처럼,
오직 맨얼굴로 서 있다.
그림의 구성은 대담하다.
원근법을 적용한 가면 행렬들은 마치 화면 밖까지 이어지는 느낌을 준다.
얼굴들로만 빼곡히 채운 이 독특한 화면구성은 히로니무스 보쉬의 구도를 연상시키지만,
앙소르의 의도는 더 개인적이고 심리적이다.
그는 세상 전체가 가면을 쓴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진실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이 그려진 1899년 무렵,
작품에 대한 평이 가혹해질수록 그는 더욱 냉소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는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림 속 가면들의 비웃음은 실제로 앙소르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조롱의 메아리였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분노, 외로움을 이 한 폭의 그림에 모두 쏟아부었다.
하지만 시간은 앙소르의 편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벨기에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았고,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앙소르의 그림이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어떤 핍박을 받더라도 인간의 얼굴 뒤에 숨은 가면을 낱낱이 까발리고 말겠다는
그의 고집불통 의지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가면이 있는 자화상'은 결국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가?
직장에서, 가족 앞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가.
앙소르는 그 용기를 화폭에 담았고,
그 용기는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어떤 가면을 쓰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