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욕망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에릭 피슬(1948~ )의 '나쁜 소년'(Bad Boy)을 보면,

우리는 묘한 불편함과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침대 위에 누운 나체의 여인, 그녀를 응시하는 소년,

그리고 등 뒤로 몰래 핸드백을 뒤지는 손.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햇볕이 이 금기의 순간을 낮의 언어로 번역한다.


2013-05-10_14;42;35.jpg 에릭 피슬, 나쁜 소년(Bad Boy), 1981


1980년대, 모더니즘 미술이 급격히 퇴조하고 금욕적인 현대미술이 '죽은 미술'로 여겨지던 시절,

피슬은 혜성처럼 등장했다.

뉴욕 화단을 뒤흔든 신표현주의의 기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는 미국 중산층의 생활을 거짓 없이 화폭에 담아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충격적이었다.


"누구라도 알몸이었다"라고 주장하며,

그는 인간의 육체에 탐닉했고 사춘기의 섹슈얼리티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나쁜 소년'이라는 제목은 이중적이다.

핸드백을 뒤지는 소년의 행위를 지칭하는 것일까,

아니면 금기된 것을 응시하는 욕망 자체를 말하는 것일까?

화면 속 소년은 여인의 음부를 그대로 드러낸 육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피슬의 천재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관객의 시선을 소년의 다른 손으로 이동시키며,

그는 이 장면이 단순한 성적 관음이 아니라 도덕적 일탈의 복합적 순간임을 보여준다.


옆 그릇에 담긴 바나나와 사과 두 알은 너무나 노골적인 상징이다.

남성 성기와 여성의 유방.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이 과일들은 금기된 지식과 욕망을 암시한다.

소년은 이미 그 과일을 맛본 것일까,

아니면 지금 막 손을 뻗으려는 것일까?


피슬이 1979년 발표한 '몽유병자' 연작은 교외의 어린이용 풀에서

자위행위에 빠진 벌거벗은 소년을 클로즈업해 화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323.jpg 에릭 피슬. 몽유병자 Sleepwalker, 1979


'피슬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그의 대담한 묘사들—알코올중독, 성적 충동, 근친상간, 비행소년—은

'나쁜 회화'로 비판받았지만,

동시에 미국 정체성의 숨은 문제를 가장 정직하게 노출시킨 작품들로 평가받았다.


'나쁜 소년'의 기법은 영화적이다.

사진을 활용하고 빛의 미묘한 표정과 이동,

순간을 포착하는 그의 방식은 마치 영화 '나인 하프 위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햇볕은 이 장면에 묘한 일상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어둠 속의 범죄가 아니라 대낮의 욕망이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7878.jpg 생일 맞은 꼬마 Birthday Boy, 1983


1948년 뉴욕에서 태어나 LA의 캘리포니아 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한 피슬은

도시 외곽의 그림으로 시작해 미국 중산층의 이면을 파헤쳤다.

70년대 금욕적 현대미술에 반기를 들며 그는 30년대 미국의 서술적 회화를

사춘기의 성적 각성에 접목시켰다.

그의 작품들은 성의 기회주의와 도덕적 불안,

10대의 방종 등 미국 중산층이 감추고 싶어 하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벗겨냈다.


'나쁜 소년'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단순히 노골적인 누드나 도덕적 일탈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때 그 소년이었거나,

혹은 지금도 여전히 블라인드 사이로 훔쳐보는 관음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9898.jpg 노인의 배와 개 The Old Man's Boat, 1982


피슬은 관객을 공범자로 만든다.

우리는 소년의 눈으로 여인을 보고, 소년의 손으로 핸드백을 뒤지며,

그 금기된 순간의 스릴을 함께 느낀다.


결국 '나쁜 소년'은 미국 중산층의 반듯한 외피 아래 숨겨진 욕망과 위선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깔끔한 침실, 블라인드로 조절된 햇볕, 과일이 담긴 그릇—

모든 것이 질서정연해 보이지만,

그 질서 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도덕적 혼란이다.


피슬은 이 혼란을 숨기지 않고 대낮의 빛 아래 드러냈고,

그래서 그의 회화는 '나쁘지만' 진실하다.

1980년대 미국 현대미술의 퇴조 속에서 그가 던진 이 불편한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정직한가?


5252.jpg 자화상, 1980


https://youtu.be/F69WBwbaZ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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