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를 거닐던 한 일본인 화가가 있었다.
둥근 안경과 단발머리,
그리고 독특한 귀걸이로 그 자신이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보였던 후지타 쓰구하루.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두 대륙, 두 전쟁, 그리고 무수한 사랑 사이를 떠돌았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유명한 '유백색 피부'다.
캔버스에 석고와 탈크를 섞어 만든 독특한 바탕은
마치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차가운 빛을 발한다.
그 위에 섬세한 먹선으로 그려진 여인들과 고양이들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숨을 쉰다.
일본화의 전통적 필법과 서양화의 유화 기법을 결합한 이 독창적인 화풍은
1920년대 파리 화단을 들썩이게 했다.
후지타의 고양이 그림들은 특별하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된 고양이들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화가 자신의 분신처럼 보인다.
때로는 여인 곁에서, 때로는 화면 중앙에서,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가늘고 섬세한 필선은 일본화의 전통에서 왔지만,
그 위에 흐르는 감성은 파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는 아름다운 나부상과 고양이 그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가 그린 전쟁화들은 그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군부의 요청으로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담았고,
전후 그는 전쟁 협력자로 비난받았다.
결국 그는 다시 프랑스로 떠났고,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며 레오나르 후지타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국과의 인연도 흥미롭다.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한 그는 경성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현재 시모노세키 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조선 풍경'은
밝은 빛의 처리와 빠른 필선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젊은 후지타의 감각적인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가파른 산등성이의 성벽과 강가의 풍경은 서양화 기법으로 그려졌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동양적 정서가 살아 숨 쉰다.
후지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백색 피부는 거리감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 위에 그려진 섬세한 선들은 깊은 친밀감을 전한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아름다움과 전쟁의 참혹함 사이를 오갔던
한 예술가의 삶이 그의 화폭 위에서 겹겹이 쌓여 있다.
1959년 가톨릭 세례를 받고 레오나르 후지타가 된 그는,
말년을 프랑스 랭스에 작은 성당을 짓고 그 내부를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데 바쳤다.
전쟁의 죄책감을 씻고 싶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평화를 찾고 싶었을까.
그 작은 성당의 벽화들은 그의 마지막 고백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다.
후지타 쓰구하루,
그는 국적도, 정체성도, 시대도 넘나들며 살았던 20세기의 유목민이었다.
그의 유백색 캔버스 위에서 동양의 먹선과 서양의 유화가 만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듯이,
그의 삶 자체가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 서서 느끼는 묘한 감동은,
어쩌면 경계 위를 걷는 이의 고독과 용기가 주는 울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