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어둠이 내리고 빛이 비칠 때,
우리는 영화관이라는 현대적 제단 앞에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빛은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는다.
빛의 반대편, 움직임을 멈춘 곳에서 화가들은 저마다의 팔레트를 들고 그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이야기를 캔버스로 끌어안는다.
영화의 한 순간이 프레임에 갇히듯,
그 순간의 감정과 의미가 그림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다.
화가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는 때로 원작보다 더 강렬한 해석이 된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고딕 영화 <더 크로우>(1994)는
한 예술가의 손에서 잉크와 선만으로 그 비극적 운명과 고독의 정수를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브랜든 리가 연기한 복수의 영혼 에릭 드레이븐은
우아한 몸짓과 고딕적인 분위기로 기억된다.
그러나 예술가 페챈(Péchane)의 잉크 드로잉 <크로우>(2016)는 그 모든 서사를 배제한 채,
주인공의 외로운 실루엣과 날카로운 시선만으로 그 내면의 고통과 존재의 무게를 압축해 보여준다.
움직이는 영상이 100분에 걸쳐 쌓아 올린 감정이,
정지된 한 장의 그림 앞에서 오히려 더 격렬하게 폭발하는 순간이다.
이는 영화가 가진 서사적 힘보다 그림이 가진 상징적 압축의 힘을 보여준다.
또 다른 그림은 영화의 아이콘이 된 한 장면을 영원히 정지시켜,
그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사이코>(1960)에서 샤워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공포의 아이콘이다.
알레한드로 실리엔토(Alejandro Cilento)의 극사실주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의 주인공,
자넷 리가 연기한 마리온 크레인의 클로즈업을 포착한다.
그림 속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의 표정보다는,
운전 중인 듯한 집중과 복잡한 내면의 흔적이 교차한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 고요한 초상화 뒤에 도사린 운명의 칼날을 알고 있기에,
이 정지된 이미지는 오히려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그림은 소리의 절정과 폭력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관객의 기억과 공포심에 의지해 구현해낸다.
고요함이 오히려 가장 큰 비명이 되는 역설.
반면, 그림은 때로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서정성과 동화적 분위기를 순수한 시각 언어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팀 버튼의 <가위손 에드워드>(1990)는 기괴하지만 순수한 소외자의 이야기다.
예술가 줄리 말라드(Julie Mallard)의 작품은 영화의 고딕한 판타지보다는
에드워드와 킴 사이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달콤하고 낭만적인 해석을 선사한다.
캔버스 위에서 피어나는 꽃과 부드러운 색채는 영화 속에 은은하게 깔려 있던 동화 같은
감성만을 추출해 증폭시킨다.
마치 영화의 주제를 한 편의 시로 다시 써내린 것처럼.
이것이 회화의 힘이다.
카메라가 포착한 구체적 현실에서,
붓은 그 속에 숨겨진 감정의 결정체만을 골라내 영원히 빛나게 할 수 있다.
영화관을 나서며 우리는 여운에 젖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장면은 시간이 지나 희미해질 운명이다.
반면 화가의 캔버스에 새겨진 그 한 장면은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장면의 재현이 아니라,
화가의 영혼을 통해 걸러진 영화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개인적인 선언이다.
우리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관객이지만,
정지된 이미지 앞에서는 사색가가 된다.
다음번 영화관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박수를 칠 그 순간,
어쩌면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캔버스가 우리와 나란히 놓여 있어,
그 감동의 순간을 색채와 형태로 바꿀 화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크린의 빛은 꺼져도, 그림 속의 빛은 영원히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