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발걸음이 무거웠다.
허름한 옷차림, 수척한 얼굴, 그리고 풀어헤친 머리.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문턱을 넘어온다.
그의 등 뒤로는 아직도 반짝이는 외부 세계의 빛이 스민다.
그러나 그 빛은 그를 따뜻하게 감싸기보다,
오히려 그가 들어선 방의 어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일리야 레핀(Ilya Repin·1844~ 1930)의 <아무도기다리지 않았다>는 바로 이 순간,
돌아온 자와 기다리는 자 사이의 모든 이야기를 한 폭의 캔버스에 압축해 놓는다.
이 그림은 한 가정의 드라마를 넘어,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가 이룰 수 있는 예술적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추레한 외투를 걸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어색하게 집으로 들어서는 이는
바로 이 집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다.
그는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다가 오랜 형기를 마치고 지금 막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시선은 의자에 앉은 노년의 여인을 향한다.
어머니일까?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의혹, 그리고 어렴풋한 기쁨이 스친다.
손에 들었던 바느질감이 무심게 무릎 위로 떨어진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아들을, 혹은 자신의 기억을 확인하듯 바라본다.
그러나 이 모든 정적을 깨는 것은 피아노 앞에 앉은 여인이다.
아내일까, 연인일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들어선 이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충격 그 자체가 응결되어 있다.
그 충격 속에서 사랑의 기쁨도, 원망의 눈물도 아직 읽을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린, 순간적인 마비 상태다.
혁명가였던 그림 속의 아버지는 사회 개혁을 향한 원대한 포부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의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채 고난을 떠안았던 가족들에게 그는
단지 무책임한 가장일 뿐이었다.
힘겹게 되찾은 평온 속에서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감격의 드라마는 없었다.
어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고,
오래전에 아버지 얼굴을 잊은 아이들은 오히려 겁에 질린 표정이다.
레핀은 이 극적인 순간을 위엄 있는 역사화가 아닌,
한 가정의 가장 내밀한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벽은 빛바랐고, 가구는 소박하다.
이 선택은 이 그림을 러시아 '이동파' 예술가들의 핵심 정신,
즉 '권력이 아닌 민중의 삶을,
이상화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려내겠다'는 신념의 결정체로 만든다.
레핀은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같은 대작으로 사회적 약자의 삶을 조명했고,
이 작품에서는 그 관심을 보다 사적이고 정서적인 영역으로 깊게 파고든다.
장엄한 역사화와 비교할 때,
레핀의 이 그림은 역사의 흐름을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이 아닌,
역사에 짓눌린 '무명의 개인'에게 시선을 겨눈 혁명적인 접근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섬세한 빛은 실내의 초라함을 고스란히 비추지만,
동시에 그 빛이 비추는 인물들의 얼굴에는 인간 내면의 가장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조각해 낸다.
‘방탕한 아들’의 귀향을 그린 성경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이 구도는,
레핀의 현실적인 필치를 통해 종교적 교훈이 아닌,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고독과 상실감,
그리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재탄생했다.
이는 구축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는
근대적 회화의 문을 연 시도로 평가받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는 제목의 아이러니.
그러나 그림 속에는 분명 ‘그’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눈빛에 ‘기다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다림의 형태가, 날것의 기대에서 침묵의 충격으로,
막연한 그리움에서 낯선 현실로 변모했을 뿐이다.
레핀이 포착한 것은 그 ‘이후’가 아닌 ‘지금’, 모든 감정이 결정되지 않은,
가장 취약하면서도 강렬한 순간이다.
우리는 그가 왜 떠났으며, 무엇을 겪고 돌아왔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의 빈자리를 지켜야 했을 방 안의 사람들이 되기도,
오랜 방랑 끝에 낯선 고향에 선 그의 처지가 되기도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단순한 가족의 재회도, 서사적 그림도 아닌,
인간 내면의 풍경을 리얼리즘의 가장 정제된 형태로 구현해 낸,
러시아 미술사가 낳은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시와 같은 작품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 역시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그림 속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들은 세파에 시달리느라 정작 가족에겐 무심했고,
남은 가족들은 각자 알아서 그의 빈자리를 메워버렸다.
요즘 아이들에겐 퇴근 후 무뚝뚝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가 불편한 존재란다.
지금 ‘혁명’이 필요한 곳은 바깥이 아니라 집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