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기억

추억 속으로

by 제임스

교회 벤치 끝자리에 앉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스며드는 겨울 햇살을 등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반짝이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열여섯 살 크리스마스 아침,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흰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내리신 특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나에게 크리스마스란, 추운 계절에 핀 한 송이 설렘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이브는 화려하게 타오르다가 재가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화려한 조명 아래서,

맥주캔을 따는 소리와 함성이 도시의 캐럴을 삼켜버렸다.

우리는 어른이 된 기쁨을, 자유를 축복한다며 밤새 춤추고 소리쳤다.

다음 날 아침,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눈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었다.


서른다섯 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드디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되었다.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불완전한 트리를 들고 “예뻐요?”라고 묻는 눈빛 앞에서,

세상의 모든 빛이 꺼져도 그곳만은 환할 것 같았다.

살짝 탄 생크림 케이크와 포장지를 뜯는 소리,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로 가득 찬 거실.

그때의 크리스마스는 작은 손 두 쌍을 품에 안고,

내가 온전히 ‘아빠’가 되는 시간이었다.


사십 대, 쉰 살. 크리스마스는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그저 바쁜 하루였다.

연말 결산, 송년회, 선물 쇼핑, 친척 방문…

벨 소리는 전화벨이 되었고,

캐럴은 백화점의 배경음악으로 전락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자정이 되면 치워야 할 번거로운 장식품이었고,

산타는 마감 기한을 의미했다.



지금, 창밖에 고요한 눈꽃이 내리길 기다린다.

아이들은 각자의 삶으로 떠났고, 옛 친구들은 연락이 뜸하다.

트리도 치우지 않은 채 방구석에 세워두고,

고요한 크리스마스를 커피 한 잔과 함께 보낸다.

이렇게 조용하고 차분한 크리스마스가 맞는 걸까.

나이 들어서야 비로소 평화를 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가끔 듣게 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징글벨”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갈 때면, 왠지 모를 설렘이 가슴을 스친다.

그 소리는 더 이상 열여섯 살의 순수한 설렘도,

스무 살의 광란의 기쁨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가 시간과 계절의 흐름 속에서 공유하는 단순한 멜로디다.

그 멜로디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너는 그 모든 크리스마스를, 그 모든 모습으로 살아냈다.”


어쩌면 나는 신나는 크리스마스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나’의 모습들이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교회 벤치의 소년, 한강의 청년, 아이들을 업은 아버지, 바쁜 직장인…

그 모든 내 모습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매년 이맘때면 나를 찾아오는 것만 같다.

오늘의 고요함은 그들이 다녀간 자리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방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눈을 내려주질 않고,

도시에 저녁 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비로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은,

지나간 모든 순간들이 쌓여 만든 이 평화로운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작은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축복도, 광란의 기쁨도, 가족의 웃음소리도 아니다.

단지 겨울나무가 서리를 머금는 것 같은,

고요하고도 단단한 현재의 시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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