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의 추억

추억 속으로

by 제임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저녁,

삼겹살집 연기 자욱한 방 안에서 부장님의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풍경.


"올 한 해도 수고 많았네!"


하는 건배사와 함께 부딪치던 소주잔의 청량한 소리.

어색하게 웃으며 상사의 잔을 받아 마시던 그 순간들이,

지금 생각하면 묘하게 그립다.



요즘 망년회는 확연히 달라졌다.

얼마 전 후배가 자랑스럽게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그렇다.

그의 회사는 금요일 오후 공방에서 향수 만들기 체험으로 송년회를 대신했다고 한다.

술 대신 향기로운 에센스를,

왁자지껄한 술자리 대신 조용한 산책을 즐겼다고.

어떤 회사는 아예 오후 4시에 시작해서 퇴근 전에 끝낸단다.

고급 호텔 뷔페에서 식사만 하거나,

에어팟 같은 경품으로 참석을 유도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통계를 보면 이런 변화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0대 직장인의 36%가 업무 시간 중 송년회를 선호하고,

38.8%는 식사만 하는 모임을 원한다.

반면 50대의 60%는 여전히 저녁 시간 회식을,

47%는 음주를 포함한 자리를 선호한다.


세대 간 간극이 뚜렷하다.

젊은 세대에게 송년회는 '개인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고,

52%가 그것을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로 꼽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신입사원 시절,

억지로 웃으며 상사의 무용담을 들어야 했던 밤들을 떠올리면 한숨이 나온다.

취기가 오른 선배의 훈계와 어깨동무하고

2차 3차로 이어지며 새벽까지 이어지던 술자리.

다음 날 숙취로 끙끙거리며 출근하던 기억.

분명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문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송년회에는 지금의 깔끔한 모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평소 말 못 했던 속내를 털어놓던 순간들.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꼽을 잡고 웃던 시간들.

계급장을 떼고 한 인간으로 마주 앉아 울고 웃던 그 밤들이,

사실은 일 년 내내 쌓인 벽을 허무는 유일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송년회(送年會)보단 망년회(忘年會)란 말이 더 정감 있고

본질을 정확히 표현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세월(年)을 잊자(忘)'는 뜻에서 '망년회'라는 말이 생겼다.

송년회는 한 해를 정리해 보낸다는 긍정적 느낌이고,

망년회뜻은 힘든 일을 잊자는 해소의 느낌이다.



망년회는 간부급과 평사원이 한자리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거의 유일한 자리이다.

고리타분한 소리 같지만, 누구에겐 기회이기도하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나누는 일.

서로의 약점과 실수를 목격하고도 웃어넘기며 동료애를 확인하는 일.

그것이 비록 술기운이 빌린 용기였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향수 만들기나 쿠키 클래스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오후 4시에 시작하는 송년회가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모든 합리성과 효율성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정돈된 모임 속에서 사라진 그 불편하지만 따뜻했던 인간미를,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연말이 다가오면 나는 여전히 그때를 떠올린다.

연기 자욱한 고깃집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웃던 우리를.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문득문득 미소 짓게 했던 그날 밤의 대화들을.

시대는 변하고 문화는 진보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립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었지만 진심으로 뜨거웠던,

그 옛날 망년회의 풍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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