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침묵

주절주절

by 제임스

최근 한 SNS에 올라온 글이 교육계를 들썩이게 했다.

요즘 초등학교의 모습이 옛날과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미술 시간에는 백지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대신

미리 그려진 스케치에 색칠만 한다.



운동회는 무조건 무승부로 끝난다.

상장 수여식은 칠판 앞에서 사라졌다.

글짓기와 그림 경시대회도 거의 없어졌다.


이유는 단 하나, '못하는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모든 아이를 배려하는 따뜻한 교육처럼 보인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교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평등이 아닌 '하향 평준화'에 가깝다.

잘하는 아이들의 성취감은 무시되고, 노력의 가치는 희석된다.

이기고도 무승부가 되는 운동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열심히 연습해도 결과가 같다면,

다음에도 최선을 다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은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그 방향은 언제나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향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도전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적자생존은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다.

환경에 가장 적합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적응을 잘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했지만,

뛰어난 적응력과 협력으로 살아남아 현생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무엇을 준비시키고 있는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경쟁을 회피하고, 실패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어떤 환경에 적응하도록 만드는가.

역설적이게도,

겉으로는 모든 아이를 배려하는 평등한 교육이라지만

결국 도태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생존에 필요한 회복탄력성, 문제해결력,

경쟁력을 기를 기회를 박탈당한 채 자란 아이들은 학교 밖 세상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좌절을 마주하게 된다.


최근 학교 운동회에서는 지는 팀 아이들의 마음 상처를 우려해

막판에 점수를 몰아주어 무승부로 만드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민원을 의식한 이벤트 대행업체들의 선택이라는데,

그 과정에서 정작 이긴 팀의 억울함과 무력감은 누구도 챙기지 않는다.

진 팀은 패배를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이긴 팀은 승리의 기쁨을 빼앗긴다.


더 큰 문제는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는 법,

타인의 노력을 인정하는 법을 배울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함께 운동회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고,

소음 민원을 의식해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를 향해

"죄송합니다. 오늘 저희 조금만 놀게요"라고

사과하는 모습까지 등장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에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미술 시간의 색칠공부도 마찬가지다.

스케치가 이미 그려진 종이를 나눠주고 색칠만 하게 하면,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은 본래 자신만의 상상력과 개성을 표현하는 창작 활동이다.

백지 위에 자유롭게 선을 긋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면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간다.

그런데 정해진 틀 안에서 색만 칠하도록 한다면,

이는 예술교육이 아니라 단순 작업에 불과하다.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창의성이다.

도구를 만들고, 예술을 창조하고, 추상적 사고를 하는 능력이

인류를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상장 수여식도 변했다.

예전에는 친구가 칠판 앞으로 나가 상을 받으면 모두가 박수를 쳐주었다.

부러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기분을 고려해

공개 시상을 하지 않는 학교들이 늘고 있다.



학교 차원의 그림·글짓기 경시대회도 거의 사라졌다.

경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퍼지면서다.

가정환경에 따른 학습 경험의 차이를 학교가 완충해주는 역할이 줄어들면서

교육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학교에서 '평등'을 강조할수록 실제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공교육이 개개인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역할을 포기하면,

결국 사교육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는 미술학원으로,

글쓰기를 잘하는 아이는 논술학원으로 향한다.

생존 경쟁의 무대가 학교에서 사교육 시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경제력이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사교육을 통해 경쟁력을 기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공교육의 하향 평준화 속에서 도태된다.

결국 평등을 위한다던 교육이 더 큰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직장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직장 내 세대 갈등에 대한 연구들은 흥미로운 현상을 보여준다.

한 중견 기업 차장은 후배들에게 업무 관련 수정 사항을 전해주거나

피드백을 줘도 '죄송하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피드백을 공격으로 인식하고, 틀렸다는 말보다 '나를 무시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말투를 지적하자니 뒷말이 나올 것 같아 말을 하지 못하는

상사들이 늘고 있다는 웃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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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위원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갈등 중

MZ세대와의 갈등이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갈등 인식은 2020년 18%에서

2023년 37%로 두 배 증가했다.

일각에서는 조직문화와 충돌 가능성이 높은 유형으로

'피드백을 건설적인 조언이 아닌, 공격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꼽는다.


직장 상사들은 직원이 잘못을 해도 따끔한 충고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작업을 다시 하라고 했더니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젊은 세대는 명확한 피드백을 원한다고 말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MZ세대 직장인 1,1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피드백이 명확한 상사'가 이상적인 상사의 1위로 꼽혔다.


하지만 정작 피드백을 받을 때는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린 시절 누구도 지적받지 않고,

누구도 칭찬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피드백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칭찬과 비판을 통해 성장하는 경험이 부족했던 이들은

직장에서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데 부정적이며

퇴사도 불사하는 묘한 상황이 연출 되기도 한다.

상사들 역시 부하 직원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 '알아서 잘 하겠지'라며

피드백을 회피하는 '과묵한 상사'가 되어간다.


연구에 따르면 상사가 활발하게 피드백할수록 직원들의 업무 몰입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리더십 역량이 부족한 관리자가 잘못된 방식으로 피드백을 하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많은 상사들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조직 내에서는 아무도 성장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로 각자의 업무만 수행하는 경직된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과잉 평등 교육이 만들어낸 도태의 역설이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로부터의 학습을 통해 진화해왔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종은 사라졌고, 적응한 종은 번성했다.

자연선택으로 인해 생물 집단이 환경에 적응하는데 유리한 유전형질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불리한 형질은 사라지게 된다.


현대 교육이 아이들에게 실패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경쟁을 회피하도록 만드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적응력을 기를 기회를 빼앗는 것과 같다.

진정한 평등은 모든 아이를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재능과 노력을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도와주되, 잘하는 것은 격려하는 것이다.

운동회에서 지더라도 최선을 다한 과정을 칭찬하고,

이겼을 때는 당당히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을 못 그려도 괜찮지만, 잘 그리는 친구를 보며 '멋지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상장을 받지 못해도 받은 친구를 축하해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교육을 통해 길러야 할 건강한 태도 아닐까.


그리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피드백은 공격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다.

칭찬받을 때는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지적받을 때는 개선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차이를 인정하고,

경쟁과 협력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경험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모든 아이를 배려한다는 명분 아래 펼쳐지는 과잉 평등은,

결국 아무도 빛나지 못하는 교실을 만들고,

나아가 건강한 소통이 불가능한 직장을 만들고 있다.

더 나아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세대를 만들어낸다.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온 방향은 도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었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라 현실이고,

그 차이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성장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드는 인위적 평등이 아니라,

각자의 색깔로 빛날 수 있는 용기와, 서로 다름을 축하할 줄 아는 너그러움,

그리고 피드백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건강한 관계를 맺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수백만 년 인류 진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생존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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