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때때로 화려한 조명과 편집된 미담으로 진실을 가리곤 한다.
몇 년 전, TV 화면 속에서 본 오뚜기의 모습이 그랬다.
대기업 총수들이 모인 청와대 간담회 자리에 유일하게 중견기업으로서
당당히 초청받은 ‘갓뚜기’.
비정규직 비율이 낮고,
수십 년간 심장병 어린이를 후원하며,
신라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 주머니 사정을 이해하고,
상속세를 편법 없이 냈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각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선한 기업’의 전형처럼 비춰졌다.
라면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 그 방송은 일종의 계시였다.
기왕이면 내가 지불하는 돈이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곳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소박한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참여라고 믿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랜 시간 즐겨 찾던 농심 신라면을 과감히 포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뚜기 진라면의 면발은 신라면 특유의 쫄깃함에 비하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젓가락을 들 때마다 ‘착한 기업을 밀어준다’는 뿌듯함이
그 부족한 식감을 채워주었다.
조금 덜 쫄깃하면 어떠랴,
기업의 양심이 쫄깃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위안하며
나는 수년간 그 맛을 참아내고 수년째 애용해 왔다.
그러나 며칠 전 접한 소식은 내가 믿어온 정의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우리가 상속세 납부의 모범 사례라 칭송했던 그 장면 뒤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가족 회사’의 탐욕이 숨어 있었다.
함영준 회장은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가족 회사에 수천억 원의 일감을 몰아주었고,
그렇게 덩치를 키운 회사를 다시 오뚜기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했다.
결국 소비자가 ‘착한 기업’이라며 팔아준 돈이 오너 일가의
승계 자금을 대는 주머니로 흘러 들어간 셈이다.
더욱 허탈한 것은 제품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게 된 사실이다.
국내 생산을 고집하는 줄 알았던 오뚜기 잡채 당면이 실제로는 중국산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라면 가격 동결 역시 생산 설비가 없는 유통 구조를 이용한
마케팅적 수단에 불과했다는 실체는 내가 느꼈던 자부심을 수치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갓뚜기’라는 이름은 거대한 이미지 마케팅이 만들어낸 정교한 가면이었고,
나는 그 위선과 가식의 연극에 열렬히 환호했던 관객이었다.
이러한 배신감은 비단 한 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정치권, 기업, 심지어 믿었던 주변 지인들에게서도
우리는 종종 ‘선함’을 가장한 ‘이익’의 민낯을 마주한다.
겉으로는 공익과 정의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사익과 탐욕을 채우는 위선은 이제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듯해 씁쓸하기만 하다.
영웅을 만들어내는 선전선동정치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핵심 전략 중 하나이다.
이렇게 위선기업을 영웅기업으로 만들고,
성범죄자 배우를 정의의 사도로 만들어
국민들을 우롱한다.
이를 모르는 대중은 위선을 진실로 믿는다.
앤서니 퀸의 영화 '25시'(1967년)는
이러한 선동적인 영웅 탄생을 다룬 작품 중 하나로,
정치적 맥락에서 영웅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흥미로운 사례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선행은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타인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가식은 오래갈 수 없다.
이제 나는 나의 식탁 위에서 그 가짜 정의를 걷어내려 한다.
내일부터는 다시 신라면으로 돌아갈 것이다.
입맛에 맞지 않는 면발을 참아가며 지지했던 나의 ‘선한 의지’가
더 이상 누군가의 배를 불리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갓뚜기라는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오직 차가운 자본의 논리만이 남았고,
나는 다시 한번 ‘믿음’보다 ‘본질’이 중요한 시대임을 뼈저리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