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한때 대구에서 그림에 소질 있는 아이에게 하는 가장 큰 칭찬이 이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인성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졌다.
1912년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이 어려워 보통학교만을 겨우 졸업했지만,
대구미술사 사장 서동진의 눈에 띄어 그림을 배우게 됐다.
재능은 곧 폭발했다.
1929년 열여덟의 나이로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연속 특선을 이어갔고
1935년에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는 마라톤의 손기정, 춤의 최승희와 함께
'조선의 천재 셋' 중 하나로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유럽의 인상파·후기인상파·야수파·표현파의 영향을 흡수한 그는,
20대 중반에 이미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향토적 서정주의'라 불리는 그의 화풍은 근대 서양화에 조선의 향토색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서정성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대 화가였던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이 5~60년대에 이르러서야 화풍을
완성한 것에 비해 매우 이른 시기였다.
〈조부상〉, 1934
도쿄 유학 시절 이인성은 김옥순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대구에서 큰 병원을 경영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이인성을 맹렬히 반대했다.
이인성이 꺼내든 것은 말도, 돈도 아니었다. 붓이었다.
그는 김옥순의 할아버지를 화폭에 담았다.
그것이 바로 〈조부상〉이다.
나무판에 유채, 49×61cm. 작은 화폭이지만,
노인의 주름 하나하나와 눈빛 속 깊이를 정직하게 포착한
이 초상화 앞에서 가족은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제 전부를 여기 담았습니다"
붓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자기소개서였다.
결국 지역 유지들의 설득까지 더해져 결혼이 허락됐고,
장인의 배려로 대구 최초의 현대식 아틀리에를 열며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으로 시작된 이 작은 그림은,
찬란하고 짧았던 한 천재의 삶 전체를 예고하는 첫 페이지였다.
〈가을 어느 날〉(1934)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인 이 30년대 대표작은,
원시적 생명력을 예찬하는 고갱 풍으로 푸른 하늘과 붉은 대지를 배경으로
향토적 서정주의가 강하게 풍긴다.
누렇게 익은 벼와 황금빛 해바라기의 풍경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반라의 처녀가 등장하는 구성은 당시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경주의 산곡에서〉(1935)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 베스트 10' 1위로 선정한 이 작품은,
신라의 고도 경주의 붉은 적토와 산세를 독자적인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담아낸 절정기의 걸작이다.
〈카이유〉(1932)
수채화 특유의 맑은 투명감보다는 유화에 가까운 불투명 수채의 일면을 가진 이 작품은,
이인성의 독특한 표현주의적 화풍이 막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의 초기 걸작이다.
일본 황실 소장이었다가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다시 찾아낸 작품이기도 하다.
〈해당화〉(1944)
해당화가 흐드러진 붉은 바닷가와 구릿빛 소녀를 꼼꼼한 붓질과 고운 색채로 공들여 그려낸 이 작품은,
향토적 서정주의가 완성된 이후 그의 대표작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오지 않는 그리운 이를 애잔하게 기다리는 서사가 화면 가득 스며 있다.
이인성의 그림 앞에서는 언제나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밀려온다.
하나는 뜨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쓸쓸함이다.
그의 붓이 즐겨 찾은 색은 경주의 붉은 흙빛이었다.
그 색은 단순한 향토의 기록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폭압 아래 짓눌린 땅의 색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마다 새로 피어나는 생명의 색이었다.
그는 "그림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다"며 향토색을 중시했다.
가장 조선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그것이 그의 예술의 뿌리였다.
삶은 그를 가혹하게 다뤘다.
유학 시절 만나 사랑했던 아내와 두 아이를 갑작스레 잃었고,
절망 속에서도 큰딸 애양을 붙들고 버텼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는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으나,
1950년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역사의 뒤안길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해방의 기쁨도 채 가시지 않은 그날 밤,
경찰의 총기 오발로 사랑하는 딸이 보는 앞에서 쓰러진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엄혹한 시대도, 아내와 아이를 잃은 절망도 버텨낸 붓이 같은 동포의 총구 앞에서 멈췄다.
"고갱은 알아도 이인성을 모른다"는 말처럼, 그는 오랫동안 잊힌 작가였다.
그러나 그의 캔버스 위 붉은 흙빛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가 미처 다 그리지 못한 조선의 풍경처럼,
아직도 따뜻하고 아프게...
개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