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Let's Study 애자일 경영 (1)
기획·설계·개발·테스트 등
순차적으로 하는 워터폴 방식
과거엔 성공했지만 지금은 아냐
빠른 자만이 살아남는 ‘속자생존(速者生存)’ 시대다. 세계경제포럼(WEF)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바프 회장이 말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요즘 기업 사이에서 ‘애자일(agile)’이 핫한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스포티파이,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네덜란드 ING은행, H&M, 자라, 유니클로 등 해외 유수 기업은 애자일을 도입해 큰 효과를 봤다. 국내에서도 카카오, 오렌지라이프, 쿠팡, 삼성SDS, NBT, 드라마앤컴퍼니 등이 애자일을 도입해 효과를 보고 있다. 최근엔 국내 4대 그룹도 애자일을 도입하고 있고,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애자일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지점 없이 24시간 운영하는 인터넷은행이 등장하는 등 업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자일은 ‘민첩함’을 뜻한다. 오랜 기간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서 제품을 완벽하게 개발하기보다는 빠른 속도로 시제품을 출시해 고객과 시장의 피드백을 받아가며 수정·보완해가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기획부터 설계, 개발, 테스트 등의 과정을 차례로 진행하는 기존 워터폴(waterfall) 방식과는 대조적이다. 소규모로 팀을 꾸리고 구성원 각자에게 오너십이나 의사결정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도 애자일 조직의 특징이다.
애자일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업계에서다. 1990년대만 해도 많은 개발자가 한곳에 모여 오랜 기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대규모 프로젝트 진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한곳에 모여 표준화한 시스템을 공유한 것이다. 하지만 소규모 프로젝트 진행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2001년 변화의 움직임이 싹텄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17명이 애자일연합을 결성해 좀 더 빠르고 유연한 개발 방식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상호작용’ ‘소프트웨어 중시’ ‘고객과의 협력’ ‘변화 대응’ 등을 담은 애자일 선언이 이때 발표됐다. 정해진 계획을 따르기보다 개발 주기나 소프트웨어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게 핵심이다. 특히 실리콘밸리 기업이 애자일 방식으로 조직문화 자체를 바꿨다. 애자일을 기반으로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각종 버그 수정을 통한 업데이트로 더 나은 서비스를 내놓는 게 핵심이다.
웹 브라우저 시장의 80%를 넷스케이프가 점유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 마이크로소프트는 절치부심하다 인터넷익스플로러(IE3) 개발을 위해 전사적으로 긴급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1995년 12월 7일 첫 번째 요구사항 리스트가 개발자에게 제공된 뒤 이듬해 3월 제품 아키텍처의 첫 베이스라인이 제시됐다. 같은 달 말에는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전체 요구사항의 30% 정도가 개발된 통합빌드 알파가 공개됐다. 이후 사용자 피드백을 적극 수용하며 시스템 환경 변화에 아키텍처를 지속적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통합테스트가 매일 수행됐다. 한 달이 지난 4월, 첫 요구사항의 60% 정도를 구현한 퍼블릭 베타 버전이 다시 공개됐다. 7월에는 80% 정도를 구현한 두 번째 퍼블릭 베타가 공개됐고, 지속적인 요구사항 변경을 반영하는 프로세스를 거쳐 8월 최종 제품이 출시됐다. 이는 정교한 계획과 보안 속에 출시효과의 극대화를 노리는 기존 방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짧은 주기의 반복 실행이라는 애자일 방식으로 개발된 IE3는 출시 1년 만에 시장점유율 30%, 2년 만에 60%, 3년 만에 80%를 차지한다.
워터폴은 요구 분석부터 기획, 개발, 테스트, 출시까지 폭포가 떨어지는 식으로 순차적인 단계를 밟아 이뤄지는 전통적인 개발 방법론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제품생산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이 방식은 자동차, 선박 등 기존 굴뚝산업에 최적화된 생산 방법이다. 문제는 요구분석, 기획 단계에서 계획했던 것들이 고객 요구를 100% 충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불확실성 시대에는 고객이 초반에 요구사항을 다 이야기하기 어렵고, 또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자주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애자일이 등장한다. 좀 더 작은 단위로 개발해 해당 부분을 고객에게 선보이고 피드백을 빠르게 받아 수정이나 이슈 처리에 기민한 대응을 하자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가 한류를 이끌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30부작 드라마라면, 한번에 다 찍지 않고 5회 정도씩 나눠 찍으면서 시청자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다음 스토리의 방향성을 정한다. 시청자가 빨려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애자일이 기존 경영방식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실행 속도와 적응성이다. 애자일은 고객 관점의 효율적이고 민첩한 변화 대응을 중요시한다. 신속한 프로토타입, 변화와 요구에 맞춘 끊임없는 수정은 지금과 같이 방향 예측조차 어려운 경영 환경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기법을 넘어 조직을 운영하는 하나의 원칙이 될 만하다. 정보기술(IT) 업계를 넘어 경영학계, 재계에서 애자일이 환영받는 이유다.
이재형 | 비즈니스임팩트 대표, 피플앤비즈니스 교수
* 위 글은 <한국경제>에 연재된 필자(이재형)의 칼럼, [Let's Study]의 내용입니다.
이재형 | 비즈니스임팩트 대표
전략 및 조직변화와 혁신 분야의 비즈니스 교육·코칭·컨설팅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KT 전략기획실 등을 거쳐 KT그룹사 CFO(최고재무책임자) 겸 경영기획총괄로 일했다.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에서 MBA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CTI 인증 전문코치(CPCC), ICF(국제코치연맹) 인증 전문코치(ACC), (사)한국코치협회 인증 전문코치(KPC)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저서로는 《발가벗은 힘》, 《스마트하게 경영하고 두려움 없이 실행하라》, 《전략을 혁신하라》, 《식당부자들의 성공전략》, 《인생은 전략이다》가 있고, DBR(동아비즈니스리뷰), 《한국경제》, 《머니투데이》, 《이데일리》, 《서울경제》 등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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