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 비즈니스로 대전환, K-콘텐츠의 넥스트 스텝
한국의 콘텐츠는 1990년 대 후반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아시아권에서는 '한류'라는 단어가 탄생할 정도로 점차 파급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 수출 상품이 된 게임을 주축으로, K-팝은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에 팬덤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한국 영상콘텐츠는 넷플릭스를 통해 잠재력을 폭발 시키며 순식간에 글로벌 콘텐츠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0년대 후반 정도부터 K-콘텐츠는 세계시장에서 놀라울 정도의 성과를 달성했다.
빌보드를 점령한 BTS, 에미상의 <오징어 게임>, 오스카상의 <기생충>, 한국 게임 최초 GOTY 후보에 오른 <배틀그라운드>, 전 세계 50개가 넘는 나라에 리메이크된 <복면가왕> 등, 가히 K-콘텐츠의 르네상스라 불릴만한 성과다. 가장 최근에는 북미 흥행 1위를 찍은 애니 <킹 오브 킹스>, 공연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토니상을 석권한 <어쩌면 헤피엔딩>까지 그간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분야에서 까지 성과를 내고 있다.
인구 5천 만에 불과한 반도의 한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콘텐츠 전 장르에 걸쳐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수준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소위 국뽕이 차오를만 하다.
하지만 기관의 IP 관련 전략을 고민하면서 봉착했던 지점은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였다.
장르마다 상황이 조금은 다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새로운 콘텐츠가 계속 나오고 성공도 거두고 있는 상황임에도 콘텐츠기업들의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 분야를 예를 들어보면 K-드라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시즌을 거듭하는 드라마는 극소수였고, 그나마도 국내 제작사가 IP를 가지지 못한 넷플릭스 드라마가 대부분이었다. 즉, K-콘텐츠는 그 성공의 과실이 일회성에 불과하고 효율성도 떨어졌다.
이것을 정책적 측면에서 어떻게 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때, 우연찮게 NBC 유니버설 코리아에서 진행하는 'Universal Korea Brand Summit'에 가게 되었다. 유니버설의 신작들을 소개하는 행사라는 것 정도만 듣고 갔었는데, 이 행사를 통해 IP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
일단, 신작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새로운 작품은 없었다. 이미 존재하는 IP의 새로운 시즌이나 장르 확장을 알리는게 주 목적이었다. 게다가 이 행사를 찾은 관객도 콘텐츠기업 보다는 F&B, 패션, 문구, 완구, 마케팅 등 정말 다양한 형태의 비즈니스가 가능한 여러 산업군의 바이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IP 사업이라는게 결국 있는 IP로 최대한 우려먹는 거구나?"
이 행사를 기점으로 기관의 콘텐츠IP 관련 전략의 방향성을 속된 말로 '우려먹기'로 정했다. 계속해서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기존에 가능성을 보인 IP가 오랫동안 소비자들에게 소구되어 계속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그런 산업으로 한국의 콘텐츠산업이 변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정부의 콘텐츠 지원사업은 늘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하고 생산해 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한 기업, 또는 콘텐츠가 여러 번 정책의 수혜를 받는 것에 대해 인색하다. 하지만 콘텐츠IP 관점에서 바라보니 IP로 하려는 새로운 시즌이나 부가사업에 대한 지원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고 기존 장르부서는 하던대로 신규 콘텐츠에 대한 기획과 제작지원을 하고, 콘텐츠IP에 대해서는 별도 지원조직이나 사업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봤다.
이러한 정책 방향성에 대해서는 당시 TF팀장이던 김일중 선배가 직관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있다.
"1년 단위의 반복적 '벼농사'에서 수십 년 열매 맺는 '과수원'으로"
이는 당시 운영했던 IP 관련 포럼에서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IP 선진국은 하나의 IP가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 받고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IP를 리뉴얼하거나 붐업을 위한 마케팅을 주기적으로 진행합니다. 그러니 기존 IP가 지속성을 가질 수 있게 정책의 방향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기관의 콘텐츠IP 사업에 대한 전략적 방향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 좋은 기회로 그해 뉴욕 코믹콘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 가보니 우리가 설정한 방향에 대해 더 큰 확신이 들었다. 코믹콘을 가득 채운 다양한 전시는 대부분 우리에게 익숙한 IP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첫 선을 보인지 수십년된 <마블>, <스타워즈>, <드래곤볼>, <원피스>, <나루토>, <건담> 같은 IP가 행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마 과거의 내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언제적 콘텐츠들 이냐며 식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IP 관점에서 보니 너무 부러웠다. 특히 일본이... 미국은 넘사벽이라 쳐도, 일본은 이제 우리가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전혀 아니었다. 코믹콘에서 일본 IP는 주류 중의 주류였고, K-IP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있었던 K-팝 커버 댄스 정도?(K-팝의 위력은 여러의미로 정말 대단하긴 하다)
한국의 콘텐츠 기획과 제작 역량은 이제 세계 탑티어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콘텐츠를 생산만 해내는 것으로는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IP가 계속해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더욱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하는 것. 이제 한국 콘텐츠산업이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갈 시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김일중, '100년 가는 K-콘텐츠 슈퍼IP 발굴·육성(콘텐츠IP마켓)', 한국콘텐츠진흥원(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