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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 산맥을 오르니 요세미티 국립공원

2016. 6. 20. 한여름 눈밭에서 놀던 요세미티 이야기.


먼 거리를 달려서 드디어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도착했으며 이곳 입구까지 온 거리는 갈팡질팡 다닌 것을 제외해도 도합 2'300 마일 (약 3'700 km)이며 여유롭게 쉬면서 다녔으므로 피곤함이 없다.  



네바다 사막을 건너 지척에 보이는 눈 덮인 산맥으로 곧장 왔으면 쉬웠지만 온갖 경치를 간섭하고 곳곳을 다니느라 이제야 도착했지만 옆으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이고 물구나무로 가던 기어가던 요세미티에 도착하면 되는 것이다. 


초입의 넓은 길 가장자리에 차를 멈추어 감상하며 중턱에서 정상 부근으로 이어진 길을 살피니 만만치 않은 길임을 직감하였고 옆에서 보면 비스듬한 직선이지만 주름치마처럼 접히고 접힌 구불구불한 산허리 길이다.  


 


이곳에도 난간이 없으며 무너진 돌더미를 벼랑 끝으로 밀어서 난간처럼 쌓아놓았고 폭은 넓게 만들어서 그나마 안정감이 들었다.   




고도의 편차가 심한 이곳을 저편에서 올라오는 가파른 길을 바라보며 옛 시절 길을 설계한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 개척자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로 정상 가까이 빈터가 있고 계곡에 흐르는 물이 있고 작은 폭포가 있어서 비포장 도로에 내려 샅샅이 살피었다.   




네바다 방향에서 요세미티 서쪽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120번이며 이를 Tioga Pass "티오가 고갯길"로 부르는데 아름답기 이를 데 없으며 3'000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는 초원과 아름다운 호수가 곳곳에 있었다.   




어느 산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의 가장 높은 산은 해발 3'997 미터다.   




정상에 오르니 자동차 행렬이 줄지어 공원의 정문에서 입장료를 내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가격표에는 입장료가 30 달러지만 브라이스 캐년에서 유효기간 일 년의 전국 국립공원 입장권을 구입했으므로 보이고 들어가면 된다. 이곳을 일 년 동안 다닐 수 있는 입장권은 60 달러이며 미국 군인은 전국의 국립공원이 무료이고 62세 이상이면 입장료가 10 달러인 것은 미국의 국립공원이 동일하다. 


참고: 인디언 보호구역 국립공원은 인디언 지방자치지역이므로 인디언 부족 자치국가에서 별도로 징수한다.) 


(미국은 유럽의 해양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무력 통상으로 식민지를 넓히고 전쟁이 빈번한 국가로서 전통적으로 무관을 숭상하는 정서가 있으므로 군인에 대한 대우가 각별한 나라여서 호텔 등에서 10 % 디스카운트를 해주는 것이 한국과 다르다. 대한민국은 강력한 국방을 기대하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심을 이끌어 내려면 미국처럼 군인을 입대부터 제대 후에도 대우하는 국민적 정서가 필요하지만 정치하는 자들의 지능과 지식이 국민의 평균지수보다 낮아서 문제다.)    




이곳 관문이 있는 곳 Tioga Psaa "티오가 령" 도로는 해발 9'943 feet (3'031 m)이며 요세미티의 최저 지대는 648 미터로서 가장 높은 산과의 차이는 3'349 미터 차이가 난다. 


해발 3'000 미터 고지대는 산소가 부족하여 활동이 제한되고 자동차는 평지처럼 시원스레 달리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뛰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미뤄보면 탁상에서 지어낸 계산인 것 같고 마라톤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란 판단이다.   




길가의 곳곳에는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 편리했다.   




3천 미터 고지에 푸른 풀밭이 있고 맑고 깨끗한 호수가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이곳에 있는 물은 모두 높은 산에서 흘러내린 무공해 눈 녹은 깨끗한 물로서 한국인이 말하는 산삼이 썩은 물 즉 약수로 보면 된다.   




사람들이 많은 호숫가 주차장에 줄을 쳐놓고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를 붙여놓았기에 방법을 찾다가 한편 언덕 줄 없는 작은 공간을 발견하고 호수로 갔다. 물 위에 쌓인 눈밭에서 혼자 여유롭게 삼각대를 세우고 기념사진을 만들던 시간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던 시간들..........    




그렇게 한참 놀다가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약간 멍청한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주차장 아스팔트에서 갖가지 기괴한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기에 다녀온 길을 말해주고 그곳에 가면 눈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레인저가 와도 줄을 쳐놓지 않아 들어간 것이므로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주차장에 있는 유럽인 중국인 등이 머뭇거리기에 위의 상황설명까지 해주고 레인저가 오면 그곳에는 쳐놓은 줄이 없어서 들어갔다고 알려주니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바위산과 호수와 곧은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의 첫 느낌은 "무공해 청정지역" 이었다.   




곳곳에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어 물가에서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는데 물맛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물은 바로 흘러내린 것이 맛이 있을 듯 하지만 뉴욕시 상수원의 물처럼 오랜 기간 자연숙성이 되어야 물맛이 좋은 것이다. (참고: 뉴욕시 상수원의 수질과 맛은 전국 평균 2위다.)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이곳 고지대에 흐르는 시냇물은 그대로 마셔도 해가 없고 가능하다면 이곳서 천렵을 해도 좋을 장소였다.   




이곳에 마그마가 흘러나오던 화산이 있었다.   




옛 조상님께서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시던 심정으로 전혀 서두름 없이 다니는 것이 나의 대륙 여행 스타일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눈치 볼 것도 없고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될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감상하고 살펴본다.   




네바다 사막에서 처박혀 작동이 불량했던 카메라를 조심스레 흔들고 털며 재작동 시키기를 반복하여 원상태가 되어 다행이었고 바위산 중턱에서 암벽 타기를 하는 클라이머를 발견하고 조리개를 당겼다.  


 


노란색 동그라미를 그린 곳에 암벽등반가들이 있는 곳이며 눈으로 식별이 잘 안 되는 거리여서 카메라를 겨냥하여 확인하고 당겨서 셔터를 눌렀다.   




내가 암벽등반에 취미를 갖고 있던 40여 년 전에는 전문 등반가들이나 품질이 우수한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생산된 장비를 갖추었고 일반 암벽등반인은 일반 등산화에 쇠로 만든 카라비나 와 질낮은 밧줄을 사용해서 바위에 올랐는데 이곳 길가에 바글바글한 남녀 등반가의 장비를 살펴보니 탐나는 것이 많았다. 


그 시절 어쩌다 고향에 가면 둘째 동생을 데리고 십오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에서 혼자 연습을 했는데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서 혹시라도 추락하면 죽었던 살았던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연락하라며 데리고 다녔다.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형은 빈정거려서 성격적으로 충돌이 많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투전이 유일한 취미로서 건전한 중에서도 건전한 나의 취향에 간섭한 것에 이해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남이 무엇을 하던 간섭하지 않고 좋은 취향이면 격려를 잊지 않는데 비해 타인은 나의 일상에 궁금증도 많고 간섭하던 옛 추억이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 색, 잡기 (술 여자 투전)과 전혀 친분이 없는 깨끗한 성품을 어찌 자신의 기질에 비교하려 든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이곳은 지나온 Zion "자이온" 국립공원과 마찬가지로 모두 바위산으로 이뤄진 곳이어서 아무 곳이나 차를 세우고 암벽에 오를 수 있는 등반가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며 요세미티는 암벽등반이 매우 자유로운 곳이다.  


 


요세미티 계곡으로 가면서 곳곳에 차를 세우고 셔터를 누르는데 특별히 구도를 생각할 것 없이 모든 사진이 쓸만하고 누구나 대충 사물을 겨냥해서 셔터를 눌러도 사진작가로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차를 멈출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그곳이 절경이며 3'031 미터 고지대에서 저지대를 향해서 내려가는 길이다.


   


아무 곳이나 걸터앉으면 그곳이 천국의 입구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천국의 문지방으로 손색이 없다.   




거대한 바위산을 절개해서 길을 만들었고 천지가 개벽한 그날 이후의 신비로운 모습을 국민에게 개방한 이들이다. 자연훼손을 주장하며 일일이 간섭하는 한국의 자칭 자연보호 운동가들은 미국 국립공원의 지정부터 개발과정을 배워야 한다. 


몇 년 전 할 일 없는 어느 중이 도롱뇽을 보호한다며 드러누워 굶으며 터널을 만들지 못하게 방해한 기억도 있는데 그런 때는 흙으로 파묻어 버릇을 고쳤어야 했다. 지식이 부족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가 속세로 기어 나와 꼬장부리던 그 친구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스타 중이 되어 우쭐거리더니 이후 무엇을 하는지.... 


유럽과 미국과 캐나다 산맥의 무수한 도로와 케이블카는 자연훼손보다는 시민을 자연의 곁으로 인도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인데 그 작은 국토에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훼방하는 무리를 보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강바닥을 파서 모래자갈을 팔아먹는 것이 아니고 토목공사발주로 혈세를 나눠먹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국민정서를 위한 개발이면 어느 정도 자연이 훼손되어도 감내해야 하는데 자동차로 지리산을 오르면 나라가 절단 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 문제다.   




옛날에 길을 만드느라 토목공사를 한 바위 언덕에 올라서 노는 청춘들은 즐겁기만 하고 그들이 노는 바위가 도로를 만드느라 무너지고 깨진 것을 인지하지 못할 듯하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   




길이 없으면 이 높고 아름다운 곳은 소수의 등반객만 바라볼 수 있었겠으나 전 국민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한 것이 오늘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빛나게 된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이 1861 ~1865 에 이르는 남북전쟁의 기간인 1864년에 이곳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인류 역사가 아니어서 추론할 필요가 없는 고정된 자연의 역사이기 때문에 자료를 찾아보니 1855년 사업가 Hutchings와 미술가 Ayres 그리고 두 명의 인원 등 모두 네 명의 탐사대가 이곳을 처음으로 왔었고 그들이 그린 그림과 글이 뉴욕에 알려지게 되어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탐사대가 보고하면 중앙에서 또 다른 탐사 기병대를 보냈는데 그때는 화가를 동행하여 그림을 그려 현지의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세계 최초이며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 옐로우스톤이 그런 과정을 거쳐 1872년 국립보호구역으로 지정이 되었으며 이곳은 1890년 개천절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자연의 웅장함을 보면서 도대체 이나라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시간이다.   




특별히 무엇을 찾아보려고 할 것 없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절경이고 자연의 보화인 곳이다.   




곧게 자란 나무는 한국서 흔히 보는 잣나무와 전나무 정도가 아니라 큰 것은 밑둥치가 대갓집 앞마당 크기이며 전봇대는 이곳에 세워두면 그야말로 성냥개비로 보일 정도다.   




세콰이어 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고 주변부터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여기저기 가족단위로 자연 속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대화하는 가족들이 곳곳에 있고 조금 떨어진 곳 시끄러운 말소리 들리는 곳에는 노랫가락처럼 들리는 중국어가 사방에서 들리고 세련되지 않은 그들의 행동과 옷차림에서 중국서 놀러 온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게시판의 지도를 바라보며 가야 할 곳을 가늠하는데 청춘남녀가 말을 건네며 Sequoia "세쿼이아" 나무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이들과 지도를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스페인에서 여행 온 커플이었고 미국이 생소하고 요세미티가 생소해서 내게 물은 것이지만 나도 요세미티에 처음 왔다고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스페인 사람에게 남미 출신이냐고 물으면 싫어한다고 했더니 자신도 그렇다고 한다. 옛날 이들의 선조가 남미를 정복하여 원주민에게 스페인 문화와 언어를 전파한 것으로 속국에 대한 지배계급 종주국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며 정복자의 위치에 있어서 그렇다. 


90 년도 뉴욕의 다민족 연합축구팀에서 운동할 때 스페인 친구가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은 남미 사람을 한참 아래로 평가하고 대화하는 것도 꺼리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당연하다며 웃는다.

남미계를 스패니쉬 (스페인 언어 사용자 혹은 스페인 사람)로 부르는 것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오리지널 스패니쉬를 이곳에서 만났으며 남미계를 머슴의 자식 정도로 아는 그들의 자존심을 오랜만에 보았다. 


하기사 작은 나라 한국에서도 경기도 사람이 전라 경상 충청 강원지역 사람을 차별하던 생각을 하면 이들의 종주국 자존심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과 세쿼이아 숲 속을 가기로 하고 걸어내려 가는데 뭐든지 천천히 구경하는 성격 때문에 그들을 보내고 홀로 걸었다. 산불로 커다란 나무들이 불에 그을리고 넘어졌으며 피해지역이 상당히 넓었다.   




유아와 미성년자에 불과한 나무가 곳곳에 누워있으며 처자들은 기념사진을 만드느라 분주히 오간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가는데 거리는 약 40 리 정도 다녀야 전체를 볼 수 있기에 중간지점에 못 미치는 곳까지 가기로 했다.    




아직 본격적인 세쿼이아 고목 집단지가 아닌데도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의 나무가 곳곳에 있으며 천연기념물 

보호수를 만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으며 잔솔가지 보호를 위해 숲 속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써있다. 




미국의 영토를 넓히는데 기여한 26대 디어도 루스벨트 대통령 (1901~ 1909)이 이곳 바위산 정상에 선 사진이 있는데 이분은 직접 발로 뛴 열정적 인물이며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도 Rough Rider 기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전하여 빛나는 무공을 세운 인물이며 이곳에는 1903년 3일간 방문하였다. 


(뉴욕 롱아일랜드 루스벨트 대통령 주택과 묘지를 방문한 기록은 천천히 이곳에 올리려고 한다.)  


 


1872 년 사진이며 수명을 다하여 선채로 숨을 거둔 세쿼이아 나무에 통로를 만들었고 밑둥치가 대갓집 앞마당 만큼 크다는 나의 말이 허풍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갸녀린 나의 몸과 비교하면 언덕에 가려진 나무 밑동의 실제 크기는 앞마당 정도인데 이 나무는 고구려가 건국하기 이전이며 인류 역사에 연세가 많은 인물 그룹에 속하는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알렉산더 왕 그들보다 연세가 많다. 


세상만사에 대해 갖가지 궁상을 떠는 성격이라서 걸으면서 고구려 역사와 세계 역사를 이 나무에 비교해 생각하며 기나긴 세월을 무사히 살아온 나무가 존경스럽게 생각되었다. 천수를 누리면 4'000여 년을 살며 지금도 생존한 연로하신 나무가 킹스 캐년 국립공원과 세쿼이어 국립공원 그리고 이곳 요세미티에 숱하게 계시지만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으나 조금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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