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포기한 젊은 세대의 심리 구조
9화. 일본 젊은이는 왜 꿈을 포기했나
― 성장을 포기한 젊은 세대의 심리 구조
꿈꾸기를 멈춘 세대
부모 세대는 "더 높이, 더 멀리"를 외쳤다.
성장이 미덕이었고, 도전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들에게 미래는 현재보다 나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식 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깨달았다(悟り, 사토리)".
성장은 허상이고,
욕심은 고통의 근원이며,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라고.
이것이 일본의 '사토리 세대'다.
사토리는 1987년 이후 출생한 이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철학이자 생존 전략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일까,
아니면 절망이 만든 자기 합리화일까?
성장 신화의 종말
사토리 세대는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 속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태어날 무렵, 버블은 이미 붕괴했고,
부모들은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에 시달렸다.
이들이 유년기를 보낸 1990년대는
일본이 처음으로 '성장하지 않는 경험'을 한 시기였다.
부모 세대가 당연하게 여겼던 승진, 연봉 인상,
내 집 마련의 꿈이 하나둘 무너져 내렸다.
아이들은 보았다.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하는 부모들의 뒷모습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안이 일상이 된 가정을.
- 1990년대 일본 실질 GDP 성장률: 연평균 1.5% (전후 최저)
- 부모 세대 평균 소득: 1997년 정점 이후 지속 하락
- 대학 졸업자 취업률: 2000년대 초반 55% 수준까지 하락
- 2025년 일본 실질 GDP 성장률: Q1 0.9%, Q2 0.7% (연율 환산, 내각부 경제사회총합연구소)
'낮은 욕망'의 탄생
사토리 세대의 첫 번째 특징은 '욕망의 축소'다.
그들은 브랜드에 열광하지 않는다.
비싼 차를 갖고 싶어 하지도 않고,
해외여행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이는 단순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체득했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가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것들―
명품, 고급 승용차, 넓은 집―이
정작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어린 나이부터 목격했다.
오히려 과도한 욕망이 부채와 스트레스,
가족 갈등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적게 원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학습했다.
이들의 소비 패턴은 극도로 실용적이다.
필요한 것만 사고,
품질 대비 가격을 따지며,
공유 경제나 중고 거래를 적극 활용한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현실적 접근
사토리 세대의 연애관도 독특하다.
그들은 연애를 비용-편익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연애와 결혼에 드는 경제적, 감정적 비용이
얻을 수 있는 만족보다 클 수 있다고 판단한다.
전통적인 연애 과정―데이트, 선물, 기념일―에
부담을 느끼며,
결혼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한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결혼 후 경력 단절과
육아 부담을 고려할 때, 독신이 더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들 역시 가정을 부양해야 한다는
경제적 압박을 부담스러워하며,
혼자 살면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즐기는 것을 선호한다.
- 20대 교제 경험 없음: 남성 43.2%, 여성 28.7% (2025년 내각부 청년 의식조사)
- 결혼 의향 없음: 20대 남성 19.8%, 여성 17.1% (2025년 기준)
- 독신 가구 비율: 2025년 전체 가구의 31.4% (총무성 국세조사 추정)
안정 추구와 위험 회피
사토리 세대는 도전보다는 안정을 선호한다.
창업이나 전직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을 택하고,
높은 수익보다는 확실한 수익을 추구한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변화'다.
부모 세대가 겪은 구조조정, 은퇴 후 빈곤,
노후 대책 부족 등을 지켜보며
미리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학습했다.
그 결과 이들은 젊은 나이부터
저축과 보험에 관심이 많고,
투기성 투자보다는 안전자산을 선호한다.
직장 선택에서도 급여나 발전 가능성보다는
복리후생, 워라밸(work-life balance),
고용 안정성을 중시한다.
사회적 성공의 재정의
사토리 세대에게 성공의 의미는
이전 세대와 완전히 다르다.
출세, 승진, 부의 축적보다는
'스트레스 없이 살기',
'자신의 시간 확보하기',
'취미 활동 즐기기' 등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보다는
'인생의 관리자'가 되고자 한다.
극적인 성취보다는 꾸준한 만족을,
화려한 성공보다는 평온한 일상을 추구한다.
이런 가치관 변화는 기업 문화와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도한 경쟁과 성과주의에 대한 회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심 증가,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문화 확산 등이
사토리 세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디지털 네이티브의 특성
사토리 세대는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첫 번째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디지털 공간은 현실만큼
중요한 생활 영역이다.
온라인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소통하며,
엔터테인먼트를 소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 만남보다 온라인 관계를 편하게 여기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데 능숙하다.
이들의 정보 소비 패턴도 독특하다.
긴 글보다는 짧고 함축적인 콘텐츠를 선호하고,
트렌드보다는 자신만의 취향을 중시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집단보다는 개인의 만족을 우선시한다.
기업과 사회의 대응
일본 기업들은 사토리 세대의 특성에
맞춰 채용과 인사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과거처럼 '열정'이나 '도전 정신'을 강조하기보다는
워라밸, 복리후생, 개인의 성장 기회 등을
어필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정부 역시 이들의 가치관 변화를 고려한
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장 담론보다는
개인의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춘
정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사회 전체의 역동성과 혁신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글로벌 현상으로의 확산
흥미롭게도 사토리 세대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젊은 세대가
다른 선진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
유럽의 젊은 세대들도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관을 보이며,
물질적 성공보다는 개인적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는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저성장, 고용 불안정, 사회적 불평등 심화 등이
젊은 세대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으로 해석된다.
코로나19가 가속화한 변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토리 세대의 특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재택근무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혼자 있기'에 익숙한 이들의 적응력이
오히려 빛을 발했다.
온라인 쇼핑, 배달 서비스, 스트리밍 등
비대면 서비스의 확산은
사토리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반면 대면 소통과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던
기성세대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의 사토리화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N포 세대',
'소확행(작고 확실한 행복)',
'YOLO(You Only Live Once)' 등
사토리 세대와 비슷한 가치관을 보이는
세대들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 역시
취업난, 부동산 가격 상승, 사회적 불평등 등
구조적 문제에 직면하면서
'포기의 미학'을 학습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장과 성취를 중시하는 문화가 강해
세대 간 가치관 충돌이 더 극심할 수 있다.
- 한국 20대 '달관' 응답률: 51.7% (2025년 청년 의식조사)
- '성공보다 행복' 중시: 20대 76.3%, 50대 48.9% (2025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주택 구매 포기: 20-30대 74.2% (2025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
- 사토리 세대형 가치관 확산: 일본 20대 85.1%, 한국 20대 68.4% (2025년 한일 청년 비교연구)
오늘의 교훈
사토리 세대의 등장은
단순히 젊은이들이
'의욕을 잃었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기존 사회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적응 현상이다.
성장 중심의 사회에서 안정 중심의 사회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물질적 성공에서 정신적 만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보여주는 신호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사회 전체의 활력과
혁신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한국 사회도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를 단순히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변화 필요성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꿈꾸기를 멈춘 이유를 이해하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구조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다음 화 예고
10화에서는 히키코모리와 사회적 고립 – 개인의 문제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를 다룹니다.
일본이 먼저 경험한 사회적 고립 현상의 실체와
이것이 개인적 일탈인지 구조적 문제인지,
그리고 한국이 주목해야 할 시사점들을 살펴봅니다.
[일본 : 잃어버린 미래가 남긴 구조적 경고]
2부 9화. 일본 젊은이는 왜 꿈을 포기했나 – 성장을 포기한 젊은 세대의 심리 구조
(이 글은 일본 내각부 2024년 청년 의식조사, 후생노동성 2025년 청년고용 실태조사, 국립청소년교육진흥기구 2024년 청년 가치관 연구,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4년 세대 비교연구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