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이 만든 경제적 악순환
13화. 일본인은 왜 돈이 있는데 소비하지 않나
― 디플레이션이 만든 경제적 악순환
가격표가 계속 내려가는 나라
마트에서 '10년 전보다 싸다'는 광고가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은 더 쌀 텐데 굳이 오늘 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발길을 돌린다.
백화점은 연중 할인 행사를 벌이지만
고객들의 지갑은 여전히 닫혀 있다.
"어차피 더 떨어질 텐데"라는 심리가
구매를 계속 미루게 만든다.
이것이 일본의 '디플레이션' 현실이다.
30년간 지속된 물가 하락은
단순히 물건이 싸지는 것을 넘어서
경제와 사회 전체의 심리 구조를 바꿔버렸다.
디플레이션의 메커니즘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1990년대 버블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자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기업과 가계 모두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를 줄이기 위해 소비와 투자를 대폭 축소했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물가가 하락했고,
물가 하락은 다시 소비 심리를 위축시켰다.
"기다리면 더 싸질 것"이라는 기대가
구매를 지연시키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기업들은 매출 감소에 대응해
비용 절감에 나섰다.
인건비 삭감, 설비투자 연기, 연구개발비 축소 등
모든 부문에서 지출을 줄였다.
특히 인건비 절감이 두드러졌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고,
임금 인상을 억제하며,
보너스와 복리후생을 줄였다.
소득이 줄어든 가계들은 더욱 절약에 나섰다.
필수품 외에는 구매를 미루고,
중고품이나 할인 상품을 선호했다.
특히 '100엔 숍' 같은 초저가 업태가 급성장한 것은
디플레이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연평균 물가상승률: 2.1% (2024-2025년, 상승 전환)
- 가계 저축률: 2.8% → 1.9% (2025년, 지속 감소)
- 기업 내부유보: 500조 엔 → 547조 엔 (2025년, 지속 증가)
- 임금 인상률: 연평균 1.8% (2024-2025년, 30년만 본격 상승)
소비 패턴의 변화, 브랜드 파워의 약화
과거 일본인들이 열광했던 명품 브랜드들이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왜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하나?"라는
가성비 중심 사고가 확산되었다.
유니클로, 무지(MUJI) 같은
'합리적 소비'를 표방하는 브랜드가 성장한 반면,
전통적인 고급 브랜드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큰 지출보다는 작은 만족을 추구하는
'소확행' 문화가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보다는 편의점 디저트,
해외여행보다는 근교 나들이,
신차 구입보다는 차량 공유 서비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었다.
1980년대까지는 경험에 투자하자는
소비 문화가 강했지만,
디플레이션 시대에는 꼭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
부동산 가격 하락은 디플레이션을 더욱 심화시켰다.
"집값이 계속 떨어질 텐데 왜 지금 사나?"라는
심리가 주택 구매를 지연시켰고,
이는 다시 가격 하락 압력으로 작용했다.
도쿄 상업지 가격은 1990년 정점 대비
80% 이상 하락했고,
2000년대 중반까지 하락세가 지속되었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가치 하락은
가계의 '체감 부'를 급격히 줄였다.
같은 소득이라도 자산이 줄어들면
소비 여력이 위축되는 '역자산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중산층 이상에서 이 효과가 두드러져
전체적인 소비 위축을 가져왔다.
기업의 내부유보 증가
기업들은 불확실성이 큰 환경에서
투자보다는 현금 보유를 선택했다.
내부유보가 급증한 반면
설비투자와 임금 인상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는 경제 전체의 순환을 막는 요인이 되었다.
기업이 돈을 쓰지 않으면
다른 기업의 매출도 줄어들고,
임금도 오르지 않아
소비가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중소기업청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이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꽽는 것이
'매출 부족'이었다.
생산 능력은 충분하지만
수요가 없어 가동률이 떨어지고,
이는 다시 고용과 투자 위축으로 이어졌다.
정부 정책의 한계, 제로 금리 정책의 효과 부족
일본은행은 1999년부터 제로 금리 정책을 실시했지만
디플레이션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기업과 가계가 돈을 빌려 투자하고 소비하지 않으면
정책 효과가 제한적이다.
대규모 재정 지출로 경기 부양을 시도했지만
일시적 효과에 그쳤다.
공공사업이 끝나면 다시 경기가 둔화되는
패턴이 반복되었고,
재정 적자만 누적되는 결과를 낳았다.
- 정부 부채 비율: GDP 대비 264% (2025년, 세계 최고 지속)
- 기준금리: 2024년 3월 첫 인상 후 0.1% 수준 유지
- 양적완화 규모: GDP의 95% 수준 (단계적 축소)
디플레이션 심리의 고착화와 세대별 인식 차이
버블 붕괴를 직접 경험한 세대일수록
소비에 대해 보수적 태도를 보였다.
"언젠가는 또 버블이 터진다"는 불안감이
소비 행동을 제약했다.
반면 젊은 세대는 처음부터 저성장 환경에서 자라
"물가가 오르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디플레이션이 '정상'이었다.
기업 경영진의 보수적 사고
기업 경영진들도 '디플레이션 마인드'에 익숙해졌다.
적극적인 투자와 확장보다는
안정적인 현상 유지를 선호했다.
혁신적인 제품 개발이나 신시장 진출보다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개선에 집중했다.
디플레이션 환경에서는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전한 선택이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창업률이 낮아지고,
기존 기업들도 보수적 경영을 선택해
경제 전체의 역동성이 떨어졌다.
사회적 활력 저하
경제적 정체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
사회 개혁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비관이 만연해졌다.
코로나19는 디플레이션을 더욱 심화시켰다.
외식, 여행, 오락 등 서비스업 소비가 급감하면서
수요 부족이 더욱 심각해졌다.
반면 일부 품목에서는 공급망 차질로 인한
가격 상승도 나타나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제기되었다.
아베노믹스의 시도와 한계
2013년 아베 정권이 내걸었던 '2% 인플레이션 목표'를
2024년에 드디어 달성하게 되었다.
2025년 일본은 30년만에 본격적인 인플레이션 체제에 돌입했으나,
장기간 고착화된 디플레이션 심리를 완전히 바꾸는 데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임금 인상의 어려움
정부가 기업에 임금 인상을 요청했지만
실질적인 강제력은 없었다.
기업들은 일시금 지급 등으로 대응했을 뿐
기본급 인상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한국도 최근 저인플레이션 기조가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소비 심리 위축,
부동산 시장 조정 등
일본과 유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고령화 진행으로 소비 성향이 낮은
고령층 비중이 늘어나고 있어
구조적인 수요 부족 우려가 커지고 있다.
- 한국 물가상승률: 2.8% (2024-2025년 평균, 목표 2% 상회)
- 가계부채 GDP 대비 104.9%로 소비 여력 제약 심화 (2025년)
- 청년층 실질소득 증가율 0.3%로 소비 위축 지속
- 부동산 시장 조정과 금리 인상으로 불확실성 증대
디플레이션 탈출의 핵심은
소득 증가를 통한 구매력 향상이다.
기업의 자발적 임금 인상이 어렵다면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선도 및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 상승 모멘텀을 만드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어야
미리 구매하려는 심리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명확한 정책 의지 표명과
일관성 있는 정책 실행이 중요하다.
규제 완화를 통한 새로운 산업 육성,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혁신 촉진 등을 통해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오늘의 교훈
디플레이션은 단순히 물가가 떨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심리와
행동 양식을 바꾸는 구조적 문제다.
한번 디플레이션 심리가 고착화되면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 일본의 교훈이다.
즉, 예방이 치료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러므로 정부와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을 넘어서
적정한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 건전성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성장 동력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이
디플레이션 예방의 근본적 해법이다.
다음 화 예고
14화에서는 정치 무관심의 확산 – 민주주의 참여 의식의 구조적 쇠퇴를 다룹니다.
장기간의 경제 정체와 사회적 피로가 만든
정치 참여 의식의 약화와 민주주의 제도의 형해화,
그리고 한국 정치에 주는 시사점을 살펴봅니다.
[일본 : 잃어버린 미래가 남긴 구조적 경고]
2부 13화. 일본인은 왜 돈이 있는데 소비하지 않나 – 디플레이션이 만든 경제적 악순환
(이 글은 일본 내각부 2024년 소비동향 조사, 총무성 2024년 가계조사, 일본은행 2025년 소비자물가 분석, 한국은행 2024년 소비 트렌드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