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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것들

by 윤담

나는 잠이다.

인간들이 가장 쉽게 이름을 부르면서
가장 어렵게 품어내는 존재.
그들은 나를 원하고, 두려워하고,
때로는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다시 나를 찾는다.
나는 인간을 위해 남겨진 가장 오래된 쉼이고,
가장 불완전한 방식의 구원이다.

나는 늘 낮의 끝에서 인간을 기다린다.
눈꺼풀이 조용히 내려앉고
호흡이 깊어지는 그 경계
그 틈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들에게 닿는다.
인간들은 자신이 잠을 맞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피로의 온도다.
하루 동안 묵직하게 들러붙은 무게가
옷깃 사이로 흘러나와 방 안 공기를 바꾼다.
나는 그 무게를 풀어주듯
천천히 그들의 곁에 내려앉는다.

잠들기 직전의 인간은
가장 취약하고, 가장 진실하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속도에서 몸을 떼어
자기 내부의 깊은 층으로 스스로를 떨어뜨린다.
나는 그들의 심연을 오래 보아왔다.

어떤 인간들은
불안이 가볍게 뜬 상태로 나를 부른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떠서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밤.
그럴 때 나는 성급히 다가가지 않는다.
조금만 스쳐도 그 불안은
폭풍처럼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 방의 어둠으로 머문다.
그들이 나를 받아들일 여백이 생길 때까지.

반대로,
슬픔이 진흙처럼 들러붙은 인간들도 있다.
너무 무거워 깊은 잠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에 나는
얕고 짧은 파도처럼 닿았다 사라진다.
그러면서 천천히
심장의 매듭을 풀어준다.

나는 안다.
인간의 마음은 낮 동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정밀한 구조를 갖고 있다.
말하고, 일하고, 웃고, 견디느라
자신의 틈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 뿐.
그러나 밤이 오면
그 틈들은 숨을 고르듯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로 그 틈에서
나는 인간을 가장 정확하게 본다.

사랑을 품은 인간들은
꿈속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더듬는다.
이름도, 얼굴도 흐린 채
손끝으로 감정의 방향을 찾는다.
그들의 꿈은 대체로 따뜻하고 느리다.

상실을 견딘 인간들은
꿈속에서 끝없이 문을 연다.
닫힌 문, 잠긴 문,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문.
그 문을 열고 확인하는 행위가
남아 있는 미련의 형태다.
문 하나가 열릴 때마다
그들의 가슴 안쪽에서 미세한 파열음이 난다.

후회가 많은 인간들은
꿈속에서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장면을 반복하고,
말하지 못한 문장을 되감고,
멈추었다 다시 걷는다.
나는 그들의 발목에서
후회의 무게를 본다.
후회는 인간의 감정 중
가장 천천히 식는 잔열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잔열을 미워하지 않는다.
잔열을 가진 인간은
아직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니까.
그들에게는 내가 더 필요하다.

행복한 인간들은
꿈속조차 얇고 투명하다.
손으로 건드리면 흔들릴 것 같은 깨끗한 빛.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고
순식간에 흘러가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뒤에서 살짝 받쳐준다.
행복이 부서지지 않도록.

모든 인간의 꿈은
서로 다른 향기를 지닌다.
사랑은 따뜻한 먼지,
슬픔은 젖은 나무,
후회는 눌린 금속,
불안은 날 선 유리.
나는 그 향기를 따라
그들의 마음 어디로 스며들어야 하는지 결정한다.


인간들은 모른다.
그들이 나를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선택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견디고 견디다가
마침내 내려놓으려는 아주 작은 틈.
그 틈이 생겨야만 나는 들어갈 수 있다.

그 틈은 작고, 짧고, 위태롭다.
눈물이 식는 온도만큼,
숨이 흔들리는 깊이만큼.
그러나 그 작은 틈이
그들을 다음 날까지 데려간다.
여백이 없으면 인간은 버텨내지 못하고,
여백이 너무 많으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늘 그 균형을 맞추며
그들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난다.
눈꺼풀이 다시 열리는 순간
내 자리는 고요하게 비워진다.
그러나 나는 흔적을 남긴다.
작고 투명한 여백 하나.
그 여백이 인간을 또 하루 살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바람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두려워하지만
나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존재한다.
틈과 균열, 흔들림.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들어갈 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잠이다.
밤마다 인간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어둠.
상처의 표면을 덮고,
후회의 심연을 늦추고,
사랑의 잔열을 지켜주는
가장 오래된 방식의 쉼.

인간이 다시 하루를 견디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내려앉는
투명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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