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된 존재로써의 투명함
새가 나는 속도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스크린 속에서 확대된 장면도, 느린 화면도 아닌
당신의 눈앞에서 공기를 가르며 스쳐 지나가는
그 실제의 속도 말이다.
새의 속도는 단순히 ‘빠르다’는 말로 환원되지 않는다.
나는 몇 번 그 결을 제대로 보려고
바람이 가리는 시선까지 틔워가며 새를 바라본 적이 있다.
날갯짓 하나가 내는 소리,
공기에 닿았다가 사라지는 깃털의 흔들림,
그 흔들림이 만든 미세한 곡선들.
그 속도는 눈으로만 보면 온전히 잡히지 않고
오히려 감각의 잔상으로 남는다.
나중에 떠올려 보면
그 속도는 소리로, 빛으로, 혹은 바람의 결로 기억되곤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한 가지 사실에 닿게 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순간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라는 본성을 갖는다.
새가 나는 속도처럼.
그래서 인간은 오래전부터 글을 쓴다.
문장은 사라지는 감각을 붙잡아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는 오래된 방식이다.
글이 없다면 새의 속도는
그냥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만 남고
구체적인 결은 모두 흩어진다.
눈앞에서 분명 보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설명할 수 없는 투명한 경험으로 바뀌어 버린다.
생각도 그렇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지나가는 생각의 속도는
새의 비행과 매우 닮아 있다.
갑자기 높이 떠오르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방향을 틀고,
때로는 너무 빨라서
우리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놓쳐 버리기도 한다.
생각의 속도는 소음도 없고,
장면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그저 스쳤던 마음의 결만
희미한 잔여감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는 종종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지”라고 말하면서도
그 생각이 언제, 어떻게, 왜 생겼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생각은 관측되지 않은 순간에는
비행 중인 새처럼
우리의 머릿속의 허공을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글쓰기는
자기 존재를 관측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문장을 쓰는 순간
우리는 순간의 감정을 붙들고
방향을 잃었던 사유를 한곳에 모아
되돌아볼 수 있는 거리 위에 올려놓는다.
글이 없다면
우리의 내면은 끝없이 새어나가는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가끔
“진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우리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누군가에게 ‘관측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
우리를 울렸던 문장,
밤새도록 떠오르고 사라졌던 생각들.
그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눈에 포착되고
누군가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비로소 존재가 된다.
새가 나는 속도를 글로 옮기는 일과
사람의 마음속 깊은 결을 글로 옮기는 일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같다.
어쩌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문장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불러내
다시 붙잡으려는
작은 기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어떤 순간의 두려움,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슬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던 취약함.
이런 감정들은
쓰지 않는다면 금세 빛을 잃고
심지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흐릿해져 버린다.
글은 그 흐릿함을 다시 불러내
우리가 지나온 결들을
생각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뒤로
새가 나는 장면을 보면
그 속도보다 먼저,
그 속도를 기록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기록되지 않은 속도는
사라지는 속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내 표정을 봐주고,
내 서툰 하루를 기억해주는 순간
나는 나로서 ‘관측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혼자서는 존재를 온전히 증명할 수 없다.
누군가의 시선, 말, 기억이 함께 있어야
우리는 확실한 형태를 갖는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언제나 결론이 같다.
우리가 남기는 글, 기록, 사유는
사라져 가는 순간을 관측하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다.
새가 공중에서 만든 작은 진동들처럼
우리의 생각도, 기억도
지나간 뒤 다시 붙잡지 않으면
사라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니
우리가 쓰는 모든 문장은
사라지지 않으려는
혹은 다시 살아보려는
존재의 미세한 몸짓인 것이다.
새가 나는 속도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속도를 설명해 보려 한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존재는 관측될 때 비로소 남고,
기록될 때 오래 머무르며,
문장이 될 때
투명한 추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의미로 변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그 글을 통해
자신의 흔들림을 이해하고
다시 방향을 찾는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문장을 붙잡는 이유다.